헐버트, 한국인이 좋아한 선교사 1위
헤이그 밀사 파견 제안 및 독립운동에 헌신, 최초 건국훈장 수여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로 알려진 호머 헐버트 선교사(1863~1949)는 1886년 7월에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미국 버몬트 주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목사이며 대학 학장이었다.
다트마우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공부하던 중 한국에 파견할 교육 선교사로 선발되었다.
미국 정부 교육국장인 존 이튼이 대학 동창인 헐버트 부친에게 아들을 보내달라는 요청 하여, 두 아들 중에 동생인 호머 헐버트가 가겠다고 동의한 기록이 남아있다.
1896년 한국에 도착하여 최초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일하였고, 학교의 운영 및 교육 방법에 대한 제도를 만드는 일을 하였다.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1891년 천문 지리에 대한 한국어 교과서 <사민필지>를 만들었다.
1891년 정부와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2년 후 1893년 10월 아펜젤러의 권유로 북 감리회 선교사로 파송되어 다시 한국에 왔다.
그는 저술 활동과 출판 사업에 헌신하였다. 재 입국 후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일하였고 이때 제본소를 설립하면서 출판사를 신문까지 인쇄할 수 있는 대형 신문사로 만들었다.
1895년에는 한국을 해외 선교사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잡지 The Korean Repository(1892년 올린거가 창, 1년 후 휴간)의 속간에 참여하였다. 1896년 독립신문 출판에도 참여하여 영문판 편집을 책임지고 운영하였다. 1901년에는 영문 잡지 The Korea Review를 창간하여 초기에는 한국 문화 소개를 하였으나 1904년 이후에는 일본의 야만적인 탄압 행위를 비판했다. 이런 이유로 1907년 일본으로부터 폐간당한다.
그의 저서로는 서양인 최초로 한국사를 다룬 The History of Korea(1905, 한국사), The Passing of Korea(1906, 한국 멸망사) 등이 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아리랑을 악보로 기록하였고, 1897년부터 1905년까지는 한성사범학교와 한성고(현 경기고)에서 교육과 교과서 편찬 업무를 수행하였다. YMCA 창립총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미국 본국의 정치 개입 반대의 지침에도 불구하고 민비 시해 이후 불안해하는 고종을 호위하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1905년 고종의 친서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서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친서 전달은 정치적 이유로 실패) 1907년에는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세계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토록 고종에게 건의하여 이준 등 3인이 파견되었고, 자신도 헤이그에 갔다. 그러나 일본의 사전 로비로 인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하고, 헐버트도 미국의 자국 소환 형식으로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돌아가서는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거주하면서 한국에 관한 글을 썼고, 3.1 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써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9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초청됨에 따라 86세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초청에 응했다. 그러나 장시간의 배 여행으로 인해 한국 도착 7일 만인 8월 5일 소천하여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지도 못한 채 영면했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 한국행 배를 타는 것을 걱정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으며, 묘비 명은 당초 이승만 대통령이 써주기로 약속하였지만 지키지 못해 비어 있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빅토리아 헐버트 박사의 묘>라고 새겨졌다. 그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2014년 금관문화훈장(한글 표기에 공헌한 공로)을 받았다. 또한 그는 한국인이 사랑한 선교사 1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