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어, 《서울 풍물지》 저술한 교육 선교사
19세기 서울의 풍경을 책으로 출간
윌리엄 길모어 선교사는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1886년 미국 정부가 파견한 3인 교육 선교사 (벙커, 헐버트, 길모어)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 졸업반에 다니던 중 한국의 교육 선교사로 선발되었다.
그는 1896년 내한 할 때 이미 결혼하여 부인과 함께 입국하였다. 그는 한국에 와서 다른 교육 선교사와 함께 정부가 운영하는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한 3년 만인 188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유력자의 자제인 학생들이 학구 의욕이 부진했고, 정부의 재정 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이유로 알려져 있다.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의 재정은 세관 수입으로 지원토록 하였으나 러시아의 간섭으로 인해 원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1887년 함께 배를 타고 한국에 왔던 벙커와 앨러스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결혼을 하게 되자, 결혼식 주례를 했다. 이것이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 결혼식이다. 결혼식은 알렌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당시 주한 외국인과 조선 귀족 50쌍이 초대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1892년 서울의 풍경을 기록한 <서울풍물지(Korea from its Capital)>를 15장으로 구성하여 출간했다. 이 책은 서울의 지리, 정부 구성, 풍경, 가정생활, 종교, 선교활동 등에 대해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다.
<서울풍물지>는 당시 서민의 삶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료로 평가된다.
첫째 당시 가장 흔한 직업이었던 물 장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물지게를 지고 양쪽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고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이 책을 통해 대동강 물을 400백 냥에(황소 60마리 가격) 팔은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가 유추된다.
둘째 다수 외국인들이 조선인은 게으른 천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반하여 그는 비합리적인 정부 제도 및 탐관오리로 인한 결과로 지적하고 있다. 당시에는 공무원의 급여가 없었고, 상대적으로 잘 사는 백성으로부터 금전을 탈취하여 급여를 보상받는 것이 보편화된 사회 실상이었다. 이런 제도로 인해 남자들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고, 이것이 외국인에게는 게으른 모습으로 비친 것이다.
셋째 당시 비위생적인 생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낙들이 음료수로 사용하는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그 빨래 물이 우물로 흘러 들어가고 다시 그 우물물을 먹는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조선인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으며 심성이 친절하고 품위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886년 입국한 3명의 교육 선교사 중 벙커 및 헐버트는 선교 활동을 지속한 것에 비하여, 길모어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브루클린 공예학교 교사, 뱅고르 신학교에서 성경 및 성서 역사 교수로 지냈고, 1906년까지 미다빌 신학교에서 구약성경과 종교사를 가르친 기록이 있다. 그 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