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와일러, 한국 문화에 맞는 교육과 신앙 주장
이화학당 교장과 최초 한국식 찬송가 제작한 선교사
로드 와일러 선교사(1853~1921)는 여성 교육을 위해 내한한 선교사로는 최초이다.
그녀는 1887년 10월 한국에 입국했다. 그녀의 선교 동기는 메리 스크랜턴 여사의 한국 여성 선교사 요청으로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녀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디트로이트에서 출생하여 오하이오 주 알레스 대학을 졸업하였고, 졸업 후 고아원 보모와 공립학교 교사로 재직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에 도착 후 이화학당에서 메리 스크랜턴을 도와 초기 학교 운영의 기초를 세웠다. 학교 행정 일체를 맡아서 운영하고, 영어, 지리 및 수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890년에는 메리 스크랜턴에 이어 2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위생 교육을 강화하고 기숙사 생활규칙을 제정하는 등 학교 질서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녀는 한국 여성을 서양 여성으로 만들지 않고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데 교육의 목적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한국 문화를 존중하여 가정식 교육을 강조했다.
그녀는 근대 한국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한 것이다.
1892년 페인에게 학당 직을 넘겨준 후 전도에 치중하여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도 충실했다.
찬송가에 대한 열정이 많아서 1892년에는 최초 우리말 찬송가인 <찬미가>를 책자화하였다. 미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에서 27곡을 선정하여 악보 없이 소책자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 찬송가이다.
찬미가는 감리교 선교사인 존스와 로드 와일러가 공동 편찬하였고, 이화학당 음악교사인 벵겔(훗날 존스 부인)과 최초 여교사 이경숙 선생이 협력하였다. 찬미가는 증보를 거듭하여 1895년 3집 81곡, 1898년 4집 90곡, 1899년 5집 176곡, 1902년 6집에는 205곡을 수록하였다.
“찬미가”의 서문에는 “한국인들의 심성에서 솟구쳐 오르는 가락으로 찬송할 수 있도록 한국인 찬송가 작곡 작사가들이 나와야 한다"라고 강조되어 있다.
1899년 그녀는 13년의 한국 선교 활동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한국의 가락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강조하며 한국 문화를 존중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실천한 것이다. 그녀의 현지화 선교는 오늘날 미종족 및 이주민 선교를 시행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언더우드가 편찬한 <상투의 나라>에 남아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