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드, 경기도 남부 지방 전도하다 39세 순교
성실과 열정의 선교사로 교육 및 지방 전도에 헌신
성실과 열정의 선교사로 알려져 있는 다니엘 기포드 선교사(1861~1900)는 1888년 10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에 왔다. 그는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서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를 1888년에 졸업했다.
졸업한 그해 1888년 8월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아 내한했다. 한국에 와서 2년째인 1890년에 메리 헤이든을 만나 결혼했다. 4년 연상이었던 그녀는 남편보다 1개월 앞선 1888년 9월 입국하여 정신학당의 교장으로 사역 중이었다.
북 장로교 선교사 중에는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 많은 데, 그가 가장 먼저 한국에 온 선구자이다. 그를 시작으로 1900년까지(1888~1900) 맥코믹 신학교 출신으로 14명의 선교사가 왔으며, 1900년 이후에도 많이 왔다. 모펫, 무어, 그레함 리 등 북장로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들이 맥코믹 출신이다.
그는 내한 초기에는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새문안 교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언더우드가 전국을 돌며 전도할 때 그를 대신해서 새문안 교회를 보살폈다.
또한 《죠션 셩교서회》 창립위원이었고 장로교 공의회 총무 역할을 2번이나 수행하였다.
1893년부터 남대문 부근 기도처소에서 사경회를 이끌었고, 1894년 겨울부터 1895년 8월까지 잠시 새문안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였다. 동대문 지역 전도를 위한 연동교회 설립에 협력하였고 부인과 함께 서울 남부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 연동교회는 1894년 모펫 선교사가 동대문 밖의 천민과 서민을 전도하기 시작하여 그레함리, 기포드, 밀러, 빈톤 선교사가 협력하여 태동되었다. 이들을 연동교회 설립 공로자 5명으로 부른다. 기포드는 1896년에는 성도가 증가함에 따라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연동교회 예배당으로 사용케 하였다. 1900년부터 게일 선교사가 담임 목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교육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892년에는 육영공원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경신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1892년부터 선교잡지 <The Korean Repository>를 통해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특히 그는 선교 기간 동안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조선의 풍속과 선교 (Everyday Life in Korea)>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의 혼례식, 조상 숭배, 귀신 공포증, 교육제도, 선교생황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각 교단별 파견 선교사 숫자, 교회 숫자 등 통계 자료가 포함되어 있어 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그는 1896년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잠시 돌아가야만 했다. 미국에서 요양 중에도 책을 발간하여 조선의 풍속을 세상에 알렸다. 그 후 2년 만인 1898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재내한 후 경기도 남부지역인 시흥, 김포, 안성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순회 전도 중 이질에 걸려 동료 선교사의 극진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1900년 4월, 39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동료 선교사들은 성실하고 일에 대한 충실함과 책임감이 강하였다고 회고했다. 제임스 아담스는 “인간적으로 매우 친근미가 넘치고 사랑이 넘쳤던 친구” “문학적인 탁월한 통찰력을 갖고 뛰어난 글을 썼던 완숙한 학자” 로 언급하고 있다.
맥코믹 대학교 동기인 모펫 선교사는 “성실과 진지한 성품을 가졌으며 , 그에게 맡겨진 일은 어떤 일이든지 충성을 다하였고, 천성적인 헌신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사적이고 양보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기포드 선교사 부부 묘비에는 ‘Write blessed are the dead which die in the Lord.(기록하라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성경 말씀(요한계시록 14:13)이 쓰여 있다.
그의 부인 메리 헤이든은 남편이 소천 후 1개월 만에 남편과 같은 병인 이질에 감염되어 소천하여, 양화진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기포드 부부는 한국 선교 초기 교육과 복음 전도를 위해 헌신한 대표적 선교사로 언급된다.
그의 어머니도 1898년 60세가 넘은 나이에 아들을 따라 이 땅에 와서 아들의 길을 따라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아들과 며느리가 소천한 후에도 계속 이 땅에 남아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 헌신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