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헤이든, 40대에 순교한 부부 선교사
여성교육과 지역 전도에 헌신하고 42세에 순교
메리 헤이든 선교사(1857~1900)는 1888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그녀는 파크 대학을 졸업하고 31세에 선교사로 지원하여 파송되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정동 여학당(현 정신여고) 2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초대 교장인 어니 엘러스의 후임이 되어 학교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복음 전하는 전도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내한 초기에는 언더우드와 함께 서교동 교회 설립에 앞장서서 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새문안 교회에서 여성 사역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서교동교회 성전 건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온 지 2년째 기포드 선교사의 구애를 받고 1890년 결혼하였다. 그녀가 4년 연상이었다. 기포드와 결혼 후 남편을 도와 서울 근교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1898년 7월에는 황해도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이 전도된 것이 그리스도 신문에 게재되어 있다.
또한 1895년 그레함 리 선교사와 공동으로 찬송가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장로교 최초의 공인 찬송가이다.
1판은 54곡이 수립되었고, 2판(1898년)은 83곡, 3판(1900년)은 87곡으로 증가되었다.
*감리회는 1892년 존스와 로드 와일러가 편집한 찬미가가 있다.
그녀는 1900년 5월 남편이 경기 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다가 이질에 걸려 소천하는 슬픔을 겪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녀 자신도 1개월 만에 같은 병으로 남편 곁으로 떠났다. 그녀의 유해는 양화진 남편의 묘소 맞은편에 안장되었다.
서교동 교회는 그녀의 헌신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장로님의 노력으로 자료 속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내고 또한 그의 묘소를 양화진에서 찾아내었다. 그리고 서교동 교회에 그녀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설치했다. 기념비에는 <풍요로운 고국을 버리고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11년간 활동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19세기 말 한국 선교 초기에 남편 기포드와 함께 교육과 복음 전도를 위해 헌신한 대표적 선교사로 언급된다. 기포드 선교사 부부 묘비에는 ‘Write blessed are the dead which die in the Lord.(기록하라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성경 말씀(요한계시록 14:13)이 쓰여 있다. 교육 선교사로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헌신하다가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