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링거, 최초 인쇄소 설립한 문서선교의 개척자
동료 선교사와 마찰로 약 6년 헌신하고 중국으로 떠남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1845~1919)는 1888년 내한했다. 그는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1845년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나 저먼 왈리스 대학을 졸업하고 2년간 목회 사역을 하다가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는 먼저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온 경우이다.
그는 1870년 중국 복주로 파송되어 17년간 교육 및 문서 선교 사역을 하였다. 복주 중서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고, 최초로 중국어 신문을 발간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미국 감리회 본부의 요청으로 1888년 42세에 한국에 왔다. 당시 한국에는 20대 선교사가 많았기에 경험이 많은 선교사로서 선교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며 후배들을 이끌었다.
한국에서 먼저 배재학당 교사로서 잠시 활동하고 1888년 말부터 인천 지역을 맡았다. 그는 한국인 노병일 조사와 함께 인천 내리 교회 설립에 기여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정식으로 부임하지 않아서인지 담임목사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 내리 교회 역사에는 1890~91년 사역한 아펜젤러를 초대 담임목사로 기록하고 있다.
올린거는 인천 사역과 함께 1889년 배재학당에 삼문 인쇄소를 설립하여 문서 선교를 시작했다. 삼문인쇄소는 한국 최초의 인쇄소가 된다.
1890년 6월부터는 <조선 성교서회(현 대한 기독교 서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이때 최초 영문 잡지인 <The Korean Records>를 발간하였고, 선교사들이 많이 기고한 영문 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를 출간했다.
그는 저술 활동도 열심히 하여 목회학 분야에 다수의 저서를 남겼는데 일부는 신학교 교재로 활용되었다. 특히 그의 저서 <기독교 문명론>은 후대 역사 연구를 위한 귀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1890년부터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였다. 1892년에는 맥길 선교사(의사)가 원산으로 파송될 때 동행하였으나 미국 감리회 본부의 파송 명령을 받지 못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애석하게도 올린거는 1893년 한국을 떠났다.
떠난 이유는 첫째 스크랜턴과 올린거의 선교 방향에 대한 마찰이다. 올린거는 정부 고위층 전도를 주장한 반면 스크랜턴은 서민 전도를 주장하여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1893년에 두 자녀(12살 아들 버티, 9살 딸 윌리)를 양화진에 안장했는데 두 자녀의 무덤이 파헤쳐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충격으로 인해 그해 9월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난 것이 한국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는 미국 고향에서 2년간 휴식한 후 1895부터 다시 중국에 가서 선교활동을 지속하였다. 중국에서 16년을 사역한 후 1911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1919년 소천하였다.
그의 한국 선교 기간은 5년 8개월 간이었지만 그는 한국에 파송된 젊은 선교사들에게 선교 방향을 지도하었고, 특히 삼문 인쇄소를 설치하여 한국 문서 선교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강직한 성품의 선교사로서 감리회 내 선교사들과 의견 충돌로 인해 한국 사역기간이 길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양화진 발굴 사업단은 헤론 선교사 묘소 옆 이름 없는 묘소 2개가 올린거의 두 자녀 묘소임을 확인하여 복원하였고, 2010년 그의 두 자녀 무덤 옆에 올린거 선교사의 기념비를 세워서 그의 헌신을 후세들에게 전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