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존스, 21세 최연소 내한한 인천 복음의 선구자

하와이 이민 장려하고 엡윗청년회를 조직

by 신재천

조지 존스 선교사(조원시, 1867~1919)는 1888년 5월 감리회 선교사로 입국했다. 그는 감리회 1세대 선교사인 아펜젤러의 갑작스러운 순교(1902년) 및 스크랜턴의 선교사 사임(1907년)으로 한국 감리회를 이끌어간 2세대 대표 선교사로 볼 수 있다.

그는 1867년 뉴욕 주에서 태어나 아메리칸 대학교를 졸업하고 YMCA 간사로 활동하다가, 20세에 해외 선교사에 지원하여 21세 최연소 선교사로서 1888년 북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전도사로 파견되었으며, 한국 사역 중 목사 안수받았다.


한국 도착 후 배재학당 수학 교사로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아펜젤러 선교사를 가까이서 도왔다. 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준 탁사 최병헌에게 복음을 전하여 훗날 정동제일교회 담임 목사가 되게 하였다.


* 최병헌 목사는 1902년 아펜젤러가 갑자기 순교함에 따라 당시 전도사였는데, 이듬해 목사 안수받고 제2대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한국인 리더로서 한국 감리회의 형성과 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1892년부터 인천지역 복음화 사역을 맡으면서 1893년 인천으로 거주지를 옮겨 생활하였다. 그는 아펜젤러가 사역한 내리 교회 2대 담임목사가 되어 11년간 인천과 강화지역의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그의 전도활동으로 1893년 강화도와 교동도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인천에 만수 교회(1895), 부평 굴재교회(1898), 부천 하리교회(1899), 부평읍 교회(1900), 문학 교회(1901), 화도 교회(1907) 등 44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1년 12월에는 인천 최초의 서구식 예배당인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을 건축했다.

1892년에는 로스 와일러와 함께 최초 한국어 찬송가인 <찬미가>를 편찬하여 감리회에서 사용토록 하였다.


1897년에는 미국 감리회 본부에서 엡윗청년회를 한국에 보급하는 결정이 내려지자, 그는 본 회의 총무로 활동하였다. 먼저 제물포 교회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출발시키고 상동교회, 정동제일교회 등에도 조직을 만들어 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감리 연합회 총무로 감리회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 엡윗청년회는 1889년 미국 감리회에서 창설되었고, 교육, 봉사 및 사회 개혁 활동을 전개하는 청년 조직이다. 엡윗(Epworth)의 의미는 웨슬리의 고향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감리회 소속의 존스, 노블, 페인 등 선교사와 노병선 등 한국인 사역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1906년 일본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는 글솜씨가 뛰어나서 문서 선교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892년부터 1898년까지 6년간 올린저가 창간한 <The Korea Repository>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00년에는 한국어 최초 월간지인 <신학월보>를 창간하여 9년간 운영하였다. 신학월보에는 목사 후보생과 평신도들을 신학적으로 훈련하는 내용이 실렸는데 존스와 최병헌 목사가 주관하였다. 1901년 헐버트가 창간한 <The Korea Review>의 주필을 겸직하였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The Rise of church in Korea(한국교회 형성사)>는 한국 초기 선교역사 및 선교사의 활동을 기록되어 한국 개신교 역사의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작성되었고 1919년 그의 사망으로 인해 유니언 신학교에서 소장되어 있었는데, 어느 한국인 교수가 이 책을 발굴하여 2013년에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교육 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1892년 인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배재학당에서 일하던 강재형 부부를 인천으로 영입하여 함께 설립하였다. 1892년 인천으로 부임한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 선교사가 여성교육을 담당하면서 영화 여학교도 시작되었다. 최초 여성 박사 김활란, 이화여대 학장 김에마, 유아교육 개척자 서은숙 등 유명 인사가 이 학교를 통해 배출되었다.


인천에서 함께 사역을 협력하면서 그는 마거릿 벵겔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두 사람은 1년 후 1893년 결혼하였다.


* 마거릿 벵겔 선교사(1871~1962)는 1890년 내한하여 음악 전공 선교사로 파견되어 이화학당에서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치다가 인천으로 파송되어 존스와 함께 사역하였다.


그는 1900년부터 지방에는 한국인 사역자가 부족한 현실을 보고 성경 공부 중심의 신학회를 운영하였다. 그는 1903년부터 3년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06년 한국에 돌아와서 중단된 문서 사역과 교육 사업을 재개하였다. 기존 성경공부하는 신학회를 성경학원으로 확대하여 1907년에는 협성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협성신학교는 남감리회와 북감리회가 연합하여 설립되었으며 존스가 초대 학장이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8년 감리회 통합 조직인 한국 감리교 연회가 조직되었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취업 이민이 시작되면서 존스는 이민 사업을 장려하였다. 그가 담임하던 내리 교회 성도들에게 권장하여 50여 명이 이민하였고, 그들이 미국 이민 1세대가 된 것이다. 그는 이민자를 위하여 신학교를 졸업한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 파견하여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당시 설립된 하와이 그레이스 연합교회에 이승만 대통령이 출석하기도 했다.


그는 21세에 한국에 와서 21년간 헌신하다 1909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부모 봉양과 자녀 교육을 위한 결단이었다.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뉴욕주 선교회 총무로 일하면서 한국 선교를 직간접으로 도왔고,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면서 책을 집필하였다. 이때 집필한 책이 <한국교회 형성사>이다.


그는 1919년 미국에서 5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뉴저지에 안장되었다. 인천 내리 교회에는 그의 선교 활동을 기념하여 흉상이 제작되어 있다.


함께 사역한 노블 선교사는 <그는 학자로서의 직관과 습성을 가지고 인간에 대한 깊은 동정과 심오한 이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그를 회고했다. 존스 선교사는 가장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온 선교사로 기록된다. 또한 한국어를 잘 구사하고 한국 역사, 문화를 가장 많이 이해한 선교사였고, 무엇보다도 인천 지역 복음화의 주역으로 활동한 선교사로 기억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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