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한국인을 깊이 이해하고 서민 중심의 선교

이상재, 이승만 선생에게 영향을 준 선교사

by 신재천

제임스 게일 선교사(기일, 1863~1937)는 40년을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연동교회를 담임하고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민의 삶을 잘 이해하고 서민 대상으로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그는 1888년 12월 평신도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캐나다 온타이오주 알마에서 태어나서,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토론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YMCA에서 근무하다가 24세에 캐나다 YMCA 선교부로부터 한국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졌는데 학생선교운동(SVM) 부흥회에서 무디의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를 결심한 것이 선교 동기이다. 그는 토론토 대학 출신의 최초 선교사가 된 것이다.


처음 서울에 도착하여 언더우드 집에 기거하였고, 1889년 3월부터 황해도 해주, 소래 등 내지를 여행하며 3개월간 언어와 한국 풍습을 익혔다. 한국인과 동일하게 생활하면서 한국의 문화를 체험했다. 이때 소래에서 평생의 동역자 이창직(당시 22세, 게일의 어학선생, 천로역정 번역 협력)을 만나 서울로 함께 돌아왔다.


1889년 6월 서울로 돌아와서 언더우드를 도우다가 8월에 부산으로 갔다. 그는 부산에서 10개월간 거주하는 중 호주 최초 선교사 데이비스의 임종(1890년 4월)을 지켜보게 되었고 복병산 언덕에 그를 매장하였다. 당시 서울에 있던 데이비스의 누나 메리 데이비스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는 데이비스의 임종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게일은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려고 했다. 그가 서울을 떠나려는 이유는 서울 거주 선교사 간의 갈등이 원인으로 본다. 당시 초기 북장로교 선교사인 알렌, 언더우드, 헤론 등 세 사람 간에 갈등이 많았던 것으로 그의 책 <내전(CIVIL WAR)>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부산에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온 헤론의 설득으로 인해 다시 서울로 가게 된다. 1890년 서울 헤론 집에 거주하면서 마펫이 잠시 운영하는 예수교 학당 (언더우드가 설립, 안식년 기간 동안 마펫이 운영)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면서 성서공회 번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891년 그를 파송한 캐나다 YMCA 선교부의 해체로 인해 후원금이 중단되어 곤란을 겪게 된다. 이때 동료 선교사 마펫의 도움으로 북장로교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그해 마펫, 서상륜과 함께 평양에서 만주에 이르는 2000km 순회 전도활동을 3개월간 하였다. 그 후 그는 12차례 이상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1892년 그는 헤론의 미망인 해리엇 깁슨을 돌보다가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원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하였는데 미국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1897년 미국 인디애나주 뉴알바니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그 이후로는 목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 부인 헤리엇 깁슨은 게일을 도우면서 활동하다가 결핵으로 1908년 소천하여 첫 남편인 헤론의 양화진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1898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부임해서 원산을 선교지로 정하였다. 북장로교 소속인 그는 원산을 양보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연동교회에 시무하게 된다. 1900년 5월부터 담임목사가 되어 한국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이곳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는 성경 강해설교였다고 전해진다. 이상재 선생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대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회고했다. 또한 천민 출신을 장로로 장립 하여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실천하였다. 1907년 세 번째 천민 출신 장로 장립에 양반들이 반대하여 결국 교회가 분리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 연동교회는 상민과 천민이 살던 연못골에 설립한 교회로서, 1894년 그레함 리와 기포드가 설립하였다. 그 후 그레함 리가 평양으로 사역지를 옮기고, 기포드가 전염병으로 소천한 후 게일이 담임목사로서 사역하였다.


그는 연동교회를 섬기는 동안 교육을 중시하여 연동 소학교와 예수교 중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벙커와 함께 한성감옥 전도활동에 참여하여 이승만을 전도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승만은 1904년 출옥 후 게일이 시무하는 연동교회에 출석하였고, 이후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도록 게일이 추천서를 주면서 적극 협력하였다. 게일은 이승만의 스승이자 멘토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선교 초기부터 성서 번역 사업과 문서 선교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서민들과 거주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연구하였다. 그는 언어 능력과 글 쓰는 솜씨가 뛰어나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여, 9권의 영문 저서, 30여 권의 한국어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1890년부터 성서의 한글 번역 활동에 참여하였다. 1892년 <사도행전>을 한글로 간행하였고, 1897년에는 최초로 <한영사전>을 발행하였다. 특히 성경의 야훼, 아도 나이를 한글 성경에서 유일신의 의미인 <하나님> 단어로 채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한국인이 부르는 신의 개념이 하나님 단어와 가장 유사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1925년 자신이 번역한 한글 성경을 출간했으나 한자식 번역과 자신만의 문체 및 맞춤법 사용으로 인해 성서공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적 번역의 의미인 <게일역 성경>으로 남아있다.


1898년 최초의 저서 <코리아 스케치>를 통해 한국에서 그의 경험을 전하였고,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영문 서적의 최초 번역본이 된다. 또한 <구운몽>, <춘향전>, <흥부전> 등 고전소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알렸다. 1903년에는 한국 선교활동을 이야기로 만든 소설 <벵가드>를 출판하였다. 그는 한국의 고전 문학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서양에 알렸기에 한국의 마테오리치로 불린다.


*1903년 간행한 소설 뱅가드(The Vanguard, 선봉자)는 선교사 마펫 및 연동교회 초대 장로 고찬익을 배경으로 만든 소설이다.


그는 40여 년을 한국에 거주하면서 한국성서공회 회장(1901), YMCA 초대회장(1903), 조선 예수교장로회 독노회 노 회장, 평양 신학교 교수, 연희전문학교 이사, 피어슨 기념성서학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런 직책들을 보면 그가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1927년 연동교회를 사임하고 <내 언제까지 내 마음에 한국을>이라는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그는 둘째 부인 루이스(1910년 결혼)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74세의 나이로 영국에서 소천하였다. 양화진에는 그의 아들 비비안 게일(두 번째 부인 루이스에서 태어난 차남, 2살에 사망)의 묘가 남아있다.


게일의 선교 사역에서 2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12차례 전국 순회 선교를 하며 한국인의 삶을 이해하는 선교를 실시한 것이다. 둘째는 한국인 동역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창직(평생 동반자, 한국어 선생), 고찬익(연동교회 초대 장로, 천민 출신) 등 한국인 동역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일은 한국인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선교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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