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스, 6개월 만에 순교한 호주 최초 선교사
호주 선교의 밀알이 된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1856~1890)는 1889년 10월 33세의 나이로 누나 메리 데이비스와 함께 내한했다. 호주 선교사로서 최초 내한 선교사이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났으며 4살에 호주로 이사하여 멜버른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 후 누나가 사역하는 남인도 엘로르에 가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나 풍토병으로 1년 만에 돌아왔다.
그 후 호주에서 콜필드 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어린 학생들을 복음 속에서 성장토록 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사역하던 성공회 목사 월프(wolfe)의 서신을 보고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의 서신에는 조선 사역의 시급함과 간절함이 표현되어 있었고 선교사가 필요함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도착 후 5개월간 서울에서 한국어 공부와 문화를 익히는 노력을 하였다. 그런 후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보여행을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300km를 20여 일 여행한 후 4월 4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여행 도중 전염병인 천연두에 걸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고열에 시달렸다. 여행 중 오두막에서 잠을 자는 등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원인이었다.
결국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 당시 부산에 거주하던 게일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품에 안겼고, 그의 시신은 부산 복병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게일은 그의 임종을 지켜본 순간을 기록하여 그의 누이에게 편지로 보냈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예수님에 관하여 저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듯하면서 편하게 잠들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비록 자신이 한국 선교의 꿈을 펼치지 못했지만 호주 장로교 선교의 밀알이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1890년 8월 호주 여전도회 선교부에서는 벨리 멘지스(부산 일신여학교 설립), 진 패리, 마리 파우셋 등 3명의 미혼 여성을 파견하였고, 청년연합회에서는 제임스 멕케이 부부(부인 사라 맥케이는 3개월 만에 소천하여 복병산에 안장)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 후 호주 각 선교회를 통해 120여 명 (해방 전 78명)의 선교사가 지속 파송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데이비스의 조카 마거릿 데이비스와 엘리스 데이비스도 포함되어 있다.
2009년 호주 선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창원에 호주 선교사 묘원이 조성되었고, 데이비스와 사라 맥케이 선교사의 무덤이 이장되어 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호주 선교에 불을 지피는 밀알이 된 것이다. 이 땅에서 밀알이 된 선교사는 많이 있다. 대동강변에서 성경을 전하고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소래에서 한국인처럼 살다가 순교한 캐나다 매켄지 선교사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이 땅에 와서 8개월 만에 순교한 루비 켄드릭 선교사 등이다. 초대교회 신학자 터툴리안의 말이 기억되는 밤이다. <선교는 순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