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홀, 눈물의 삶을 살아간 평양의 어머니

남편과 딸을 먼저 보내고 43년을 헌신

by 신재천

로제타 홀 선교사(1865~1951)는 43년을 평양과 서울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젊은 시절 남편과 자식을 양화진에 묻고, 자신은 평생 이 땅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녀는 미국이 선정한 200대 여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뉴욕주 설리번 카운티에서 농장주의 딸로 태어났다. 뉴욕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의료 선교사의 필요성을 듣고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었다. 의대 공부 후 뉴욕 빈민가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제임스 홀을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1889년 8월 약혼하였다. 당시 제임스 홀은 중국 선교사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조선으로 선교지를 변경하였다.


그녀는 1890년 10월 북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남편 제임스 홀보다 1년 앞서 서울에 와서 정동 보구여관의 2대 의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당시 보구여관은 초대 여의사인 하워드가 건강 문제로 사임 상태였다. 사역 시작 시 스크랜턴 대부인의 도움을 받았으며, <여성 의료 사업은 여성의 힘으로 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한국인 보조원으로 김점동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이다.


* 박에스더는 로제타의 도움으로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으로 유학하여 의사가 되었고, 1900년 5월에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보구여관 및 광혜여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미국식 이름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박 씨로 표기되었다.


로제타가 한국 온 지 1년 후 약혼자 제임스 홀이 한국에 도착하였고, 1892년 6월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역지가 서울과 평양으로 서로 달라서 결혼 후 2년간 떨어져 살았다. 1894년 5월 로제타도 평양으로 사역지를 임명받아 드디어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평양 부임 1개월 만에 청일전쟁이 시작되어 모든 선교사가 서울로 철수해야만 했다. 이때 로제타 부부도 철수하였으나, 전투로 인해 부상자가 많아지자 제임스는 사명으로 받아들여 평양으로 돌아가서 부상자를 돌보았다.


그러나 1894년 11월 남편 제임스 홀은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려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당시 2살 아들 셔우드 홀과 임신 중인 딸 에디스가 있었다


남편의 순교 후 친정 어머니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 로제타는 미국 뉴욕으로 돌아갔다. 에디스를 출산하고 후원금을 모집하며 3년을 지냈다. 그 기간 중 남편의 모교회 캐나다 온타리오주 글렌비엘 교회를 방문하였고 그곳 성도들로부터 눈물의 환영을 받는다. <제임스 홀 때문에 우리는 조선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와 재정 후원을 약속하였다.


1897년 2월에는 미국에 머물면서 평양 기홀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해 8월에는 남편의 이야기를 《닥터 홀의 전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드디어 1897년 11월 한국에 재입국하였다.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1898년 5월 평양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또 큰 아픔을 겪었다. 평양에서 다시 사역을 시작할 때 3살 딸 에디스가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슬픔을 또 겪는다. 이제 아들 셔우드 홀만 바라보며 살아가야 했다. 그녀는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역을 시작하였다.


남편 모교회의 후원금으로 광성학교를 설립하였고, 여성 병원인 광혜여원을 설립하였다. 광혜여원의 건물은 당시 선교사를 박해하던 평안 감사가 그의 부인의 병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헌납한 것이다. 광혜여원 바로 옆에는 어린이를 위한 에디스 마가렛 기념병원을 설립하였다.


1898년 광혜여원 안에서 맹인 교육을 시작하였고, 이것이 후일 평양 맹인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녀는 한국 최초로 맹인을 위한 점자법을 개발하여 사용했다. 1900년 6월에는 미국에서 학력을 인정하는 평양 외국인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에는 농아학교를 설립하였다. 1912년부터 광혜여원에서 여성들에게 의학을 가르쳤다.


그녀는 평양에서 20년간 의료와 교육 선교사로 헌신한 후 1917년 서울로 왔다. 동대문 부인 병원(현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사역하며 여자 의학반을 개설하였고, 1921년 동대문 부인병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제물포 부인 병원(현 인천기독병원)을 설립하였다. 조선 여자의학 강습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는데, 1928년에는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원(현 고려대학교 의대 전신)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아들 셔우드 홀의 의료사역(혜주 구세병원 사역)을 도우다가 1933년 11월 68세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 뉴저지에서 거주하다가 1951년 향년 86세로 소천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양화진 남편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현재 양화진에는 그녀의 딸 에디스도 안장되어 있고, 평생을 의사로서 한국에서 헌신한 그녀의 아들 셔우드 홀도 91세에 소천하여 양화진 부모의 묘소 옆에 안장되어 있다. 며느리 매리언 홀도 함께 안장되어 있다.


그녀의 묘비에는 로마서 14장 8절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땅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고 그 고난 속에서도 헌신한 그녀의 한국을 위한 사랑과 헌신의 삶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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