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빈톤, 강한 성품으로 의료보다 전도에 집중

부인과 자녀 넷을 잃은 선교사

by 신재천

찰스 빈톤 선교사(1856~1936)는 1891년 4월 입국하여 제중원 3대 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정부의 부패와 제중원내 복음 전도 거절에 따라 2년만에 사임하였다. 그리고 자택에 개인 병원을 설치하여 환자를 돌보고, 의료보다 복음 전도에 집중한 선교사이다.

​* 역대 제중원 원장 : 1대 알렌(1885), 2대 헤론(1887), 3대 빈톤(1891), 4대 에버슨(1893)


그는 1895년 미국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으며,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 레티샤와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소년 때부터 의료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의학 공부를 하였으며 한국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다.


1891년 한국에 도착한 후 헤론의 순직으로 비어있던 제중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제중원 운영권이 정부에 있어 재정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제중원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정부 방침에 반발하여 진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의사이지만 복음 전파에 많은 열정을 보였는데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교회를 설치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금하였기에 실망한 것이다. 특히 정부의 부패로 제중원의 재정 지원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정부와 마찰로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제중원에서 사역할 때 자택에도 사설 진료소를 마련하여 서민들을 치료하고 돌보았고, 동시에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평양, 의주, 만주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파했다. 동대문 지역에서 어려운 평민과 천민을 위한 연동교회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협력하였다.


그는 문서 선교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894년부터 선교사 공의회(현 성서공의회) 창설에 참가했으며, 기독교 신문 및 잡지 발간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97년 기독교 신문인 <The Christian News> 편집인을 하였고, <The Korean Mission Field> 발간의 실질적 책임자로 역할하였다. 성서 실행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조선 선교 문서회의 창설에 기여하였고, 북장로교 선교회 서기로서 봉사하여 많은 회의록을 남겼다. 1895년 10월 호 <코리안 레포지토리>에서 백정 전도 활동을 진행하는 무어 선교사의 곤당골 교회(연동교회) 이야기를 기고하기도 했다.


1904년에는 나병환자 실태조사 위원으로 참가하였고, 훗날 북 장로교가 나환자 구호사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 장로교는 1909년 부산 나병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선교사로 나타난다. <제사는 저주다>라고 외치며 성도들의 제사를 강력 반대한 기록이 있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성도들이 주일에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하는 도구를 모두 빼앗아 물의를 일으킨 일화가 있다. 또 다른 일화로는 왕궁에 가서 고종에게 회개하라고 외쳐서 잡혀간 적이 있다. <임금이 많은 궁녀를 거느린 것은 죄이므로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외친 것이다.


그러나 1907년 선교사 신분으로 벽지를 수입하여 물의를 일으킨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1908년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났으며, 미국에서 거주하다 1936년 뉴욕에서 소천하였다.


현재 양화진에는 그의 아내 레티샤와 3자녀가 안장되어 있다. 레티샤는 결혼한 직후 남편과 함께 내한하여 남편의 사역을 도왔다. 그러나 어린 나이의 두 자녀가 숨진 충격으로 인해 그녀도1903년 12월 소천했다. 1894년 첫째 자녀인 캐디가 숨지고, 1896년 둘째 자녀인 토미가 숨진 것이다. 1908년에는 하나 남은 딸 왈더 마저 죽음을 맞이하여 빈톤의 슬픔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는 이 땅에 부인과 자식 3명을 묻고,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선교사 직을 사임했을 것이다. 양화진에 있는 부인과 3자녀의 비문에는 오직 이름만 적혀있어 쓸쓸함을 더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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