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드, 숭실대학교 설립 및 대구 선교 개척자
부산에서 대구까지 산을 넘어 복음 전한 선교사
윌리암 베어드 선교사(배위량, 1862~1931)는 40년간 이 땅에 거주하면서 숭실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전도와 교육에 헌신한 선교사이다. 부산 및 대구 지역 개척 선교사로서 복음의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평양에서 숭실학당을 설립하여 최초 정규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한국인과 가까이 살기 위해 한국인 거주 지역에 집을 얻어 살면서 삶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그는 1862년 미국 인디애나 찰스턴에서 출생하여 1888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델 노르트 대학 학장으로 근무했다. 1890년 애니 아담스와 결혼하고, 북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받아 1891년 1월 내한했다. 그는 멕코믹 신학교 동창으로 절친했던 마펫과 함께 선교사의 꿈을 키웠는데 결국 두 사람은 한국에 온 것이다.
그는 부산에서 순회전도 및 사랑방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였다. 1893년 6월 베어드 집 사랑방에서 서경조 고학윤 등 10여 명이 예배드렸는데 이것이 초량교회의 시작이었다(베어드 일기장 기록을 근거).
지역 순회 전도에 나서 양산 물금 교회, 밀양 유천 교회, 청도 화양 교회, 영천 대창 교회를 시작하였다. 1895년 1월에 부산에 한문학교를 열어서 한문 성경과 다양한 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부산에서 호주 선교사들의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그는 내륙 지방으로 눈을 돌렸다. 내륙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밀양, 청도를 거쳐 대구로 이동하며 순회 선교를 전개하였다. 당시 그의 어려움과 개척 정신을 기념하여 산새가 험한 경북 청도 팔조령에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893년 4월에 베어드 일행이 대구에 첫 도착하였는데 이때를 대구에 최초로 복음이 전해진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2차례 대구를 추가 방문한 후 인구 규모 및 약령 시장을 보고 내륙의 중심지로 인식하고, 대구에 선교 지부 설치를 건의하였다. 당시 내륙 선교가 금지되었기에 상당한 모험을 시도한 것이었으며 미국 공사의 반대도 강했으나, 결국 1895년 11월 선교 지부를 설치를 승인받았다. 당시 베어드 선교사의 경상도 순회 선교 길은 지금도 순례길로 추천되고 있다. (상향: 부산 동래, 양산, 물금, 밀양, 청도, 대구, 하향: 대구, 상주, 의성, 영천, 경주, 울산, 부산)
1897년 4월 베어드 가족은 대구로 이사하여 거처를 마련하고 교회를 시작하였다. 남문 안 정완식 집과 땅 420평을 구입해 거처로 정했는데, 이곳이 대구 제일교회가 된 것이다. 교회 개척 예배를 준비하던 중 그해 11월 서울로 가서 장로교 교육 선교 사업을 총괄하라는 선교본부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구 선교는 처남인 아담스 선교사에게 인계하였다.
그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서북지역을 방문하고 평양에 교육사업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평양으로 이주하여 평양에 숭실학당을 설립하였다. 숭실학당은 베어드 사택에서 13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1900년 정식 중학교가 되었으며, 1905년부터 대학 과정의 교육을 실시하여 현재 서울 숭실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 정규 대학교육의 효시가 된다.
그는 초대 교장을 맡아 숭실학당의 발전에 헌신하다가 105인 사건의 혐의에 연루되어 1916년 3월 사임하였다. 그의 친구 마펫이 1917년 숭실학당은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베어드는 문서 선교에 치중하였다. 1931년 10월 숭실 학교 창설의 날 행사에 초청되어 참석을 하였다. 그러나 이 행사를 마지막으로 장티푸스에 걸려 2주간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해 11월 소천하였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평양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되었다. 현재 양화진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애니 아담스(안애리, 1864~1916)와 사이에 5남매를 두었다. 그러나 두 자녀(첫 딸 낸시, 다섯째 아더 패리스)를 병으로 이 땅에 묻었다. 그녀는 1899년 평양 외국인 학교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고, 숭의여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한국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기여하였는데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440장 <멀리멀리 갔더니>, <나의 갈 길 모르자>를 작시하였고, 1986년 한국어 회화 교재 <조선어 50강>, 1906년 식물 도설(식물학 서적)을 편찬하였다. <멀리멀리 갔더니> 찬송가는 그녀의 첫째 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슬픈 마음을 표현한 찬송가이다.
또한 그녀는 전국 순회 전도에 3번이나 참여한 강인한 여성 선교사로 기록되어 있다. 1916년 6월 51세의 나이로 암으로 별세하여 평양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현재 양화진 제2묘역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베어드의 재혼한 부인 로즈(베로사)는 평양 성경학교 교장을 봉직했으며 성서 번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둘째 아들 베어드 2세(배의림, 1897~1987)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한국 선교사로 재입국하여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 활동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별세 후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나의 갈 길을 마치고 믿음으로 지켰으니(딤후 4:7)>라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 리처드 베어드(배위치, 1898~1995)는 1923년 입국하여 강계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였고, 강계성경학교 교장으로 사역하였다. 아버지의 선교 일대기를 1968년 <William Baird of Korea>를 책으로 편집하여 출간하였다. 1995년 1월 별세하여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