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펫, 평양 복음의 선구자

평양에 신학교 설립하여 한국인 목사 양성

by 신재천

사무엘 마펫 선교사(마포삼열, 1864~1939)는 40년을 이 땅에 거주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한 선교사이다. 평양 신학교를 설립하여 최초 장로교 목사 7명을 육성하였고 숭실대학교 학장으로서 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성경을 가슴에 안고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몸소 실천한 한국 초창기 위대한 선교사이다.

그는 1864년 미국 인디애나 주 메디슨에서 출생하여 1888년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1년간 미국에서 교회를 섬기다가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0년 1월 26세에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맥코믹 신학교는 북 장로교에서 한국 선교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이다. 이 학교 출신 선교사로는 1888년 입국한 기포드를 시작으로 1890년 모펫, 베어드, 1892년 그레함 리, 무어, 스왈론, 1895년 아담스, 1900년 이후 번하이젤, 블레어, 바레트, 클락 등 많은 선교사가 있다.


그는 내한 후 이미 평양에서 의료 선교하던 메리 엘리스 피쉬*를 만나 결혼하였고 슬하에 제임스(미국에서 목회)와 찰스(인도에서 선교) 두 아들을 두었다.


* 메리 엘리스 피쉬(1870~1912)는 1897년 12월 내한하여 평양에서 여성교육을 위해 부녀자 성경반을 운영하였고, 평양 외국인학교 중등교육과정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04년 평양 맹인학교를 개교하여 맹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2년 7월 이질에 걸려 42세에 소천하였다.


그는 한국 도착 후 3년간 서울에 거주하면서 고아원 운영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사역 중 틈틈이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 지역을 순회 방문하였다. 1890년 한국 도착 직후 아펜젤러와 헐버트의 평양 순회 전도활동(1달)에 참여하였고, 1891년에는 게일, 서상륜과 함께 3개월 간의 2차 전도여행으로 평양, 의주 및 중국 봉천까지 다녀왔다.


1차 선교 여행 때 마펫은 평양의 한 여관에 머물렀는데, 여관 벽이 한문 성경으로 도배된 것을 발견하고, 벽에서 성경을 떼어내어 별도 보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여관은 장대현교회 건물이 세워지기까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린 곳이고 여관 주인 최치량은 평양 복음화에 앞장선 인물이 되었다.


그는 전도여행 도중 서북 지역에 선교사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선교할 지역으로 결심했다. 그리고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평양 선교지부 설치를 건의하였다. 1893년 마침내 평양에 선교지부를 설치 허가가 되면서 그는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평양 널다리골에 가옥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평양 최초 장대현 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는 노방전도와 사랑방 전도를 실시하여 성도가 증가하였고, 1899년 평양 시가지가 보이는 장대현 언덕에 예배당을 건립하고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장대현 교회는 성도가 늘어남에 따라 산정현교회, 남대현 교회, 사창골 교회의 개척을 지원하였으며, 평양 대부흥의 시발지가 되었다.


마펫 선교사의 평양 전도 활동에는 많은 수난이 있었다. 노방 전도를 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당시 깡패 이기풍에게 두 번의 수난을 당했다. 장대현 교회 건축을 하던 중 이기풍 일당이 찾아와서 훼방을 하였고, 두 번째는 교회에 설교하러 가는 도중 이기풍으로부터 습격당해 턱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든든한 한국인 동역자가 있었기에 평양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다. 백홍준, 김성집, 한석진, 서경조, 최치량 등이 그의 동역자였다.


*깡패 이기풍은 청일전쟁으로 원산에 피신 중 스왈론 선교사의 노방전도를 받은 후 그날 밤 꿈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 될 사람이다.》 그 후 회심하여 스왈론 선교사를 모시는 일군이 되고, 이후 마펫 선교사를 만나 사과하였다. 그 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장로교 초대 목사 중 일인이 되어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목사 안수 후 제주도로 파송되어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호남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평양에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한국인 사역자의 양성이 필요됐다. 마펫은 1901년 평양 서문 밖에 6천여 평 부지를 구입하여 평양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1904년부터 초대 교장이 되어 24년간 헌신하였다. 1907년 첫 졸업생으로 7명이 배출되어 최초 장로교 목사로 안수받았다.


*7명의 최초 장로교 안수자는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송 린스,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이고, 그 후 김익두, 함태영, 남궁혁, 주기철 등 800여 명의 목사가 평양신학교에서 배출되었다.


마펫은 교육 사업에도 큰 비중을 두고 사역하였다. 1903년 숭의 여학교를 설립하였고, 1918년부터 10년간 숭실 중학교와 숭실 전문학교 교장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3.1 운동 후 총독부의 성경 과목 폐지 주장에 끝까지 맞서 싸웠으며, 성경 과목을 중지하기보다 차라리 폐교를 결정하였다. 그 후 평양 신학교는 1952년 전쟁 중에 대구에서 다시 개교하였고 이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60년 교단 분리로 인해 현재 장신대(통합)와 총신대(합동)로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독립 활동에도 기여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맥쿤, 에비슨 등과 함께 이 사건은 날조된 것이며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고 미국 장로교에 보고하고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힘썼다. 1919년에는 장로교 8대 총회장을 맡아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 105인 사건은 1911년 일본 총독부가 민족 지사를 숙청하기 위해 총독 미수 사건을 날조하여 애국지사 600명을 숙청하여 고문한 사건이다. 그중 105인을 감독에 가둔 사건으로 숙청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1936년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1939년 10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몬로비아에서 뇌졸중으로 75세로 소천하였다.


그의 묘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4년 CBS 취재에 의해 밝혀졌는데, 몬로비아 시 근처 카펜터리아 공동묘지였다. 그의 묘비에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소천할 당시 거주할 곳이 마땅치 않아 지인의 집 차고를 개조한 방에 거주했다고 한다.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위대한 거목 선교사는 말년까지 청빙 하게 살았던 것이다.


한국에서 묻히고 싶다는 유언이 그의 아들을 통해 장신대에 전해지면서 장신대에서는 현지를 방문하고 2006년 5월 장신대 캠퍼스에 그의 유해를 이장하였고, 그를 기리는 좌상이 세워졌다. 그는 한국을 떠난 지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1935년 평양신학교 내에 마펫 기념관을 만들었으나 볼 수가 없고, 현재 장로교 신학대학교 내 마펫 기념관이 있다.


그의 첫 부인 엘리스(1912년 평양에서 소천)에게는 2명 아들을 두었고, 재혼한 루시아 (1915년 재혼, 첫 부인의 4촌 여동생)에게는 3명 아들을 두었다. 다섯 아들 중 네 명이 사역자로 헌신하였고, 두 아들은 한국 선교사가 되어 아버지가 사역한 나라에 헌신하였다. 그들은 고향인 평양을 갈 수 없어 한 사람은 안동에서, 한 사람은 대구에서 사역하였다.


셋째 아들인 사무엘 마펫(S.H. Moffet, 마포 삼락)은 휘튼 대학, 프린스턴 신학교, 예일 대학에서 공부한 후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8년간 중국에서 선교활동 후 1955년 한국에 왔다. 안동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경안고교 이사장과 경안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 예일린(마애린)과 결혼하였다. 예일린은 안동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아동복지회 일을 하였다.


넷째 아들 하워드 마펫(마포 화열, 1917~2013)은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후 1948년 31세의 나이로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 동산 의료원에서 헌신하였다. 1959년 병원장이 되어 60 병상이던 병원을 1천여 병상의 대형 병원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1948년부터 1976년까지 대구 애락 보건병원장을 맡아 한센병 환자를 돌보았고, 농어촌에 120여 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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