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슨, 서울역에서 천여 명의 송별을 받은 선교사

연세 세브란스 병원 설립자

by 신재천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1860~1956)는 43년간 이 땅에 거주하며, 세브란스 병원을 건축하고 한국인 의사를 양성하여 한국인 자체적으로 의료 활동을 하도록 만든 선교사이다.

그는 1860년 영국에서 태어나 6살 때 캐나다 온타리오 주로 이주하여 자라났다. 1887년 토론토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를 할 만큼 우수한 인재였다.

대학교 재직 중에는 게일, 하디와 함께 토론토 의료 기독교 청년회(YMCA)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893년 6월 북 장로교 후원으로 내한했다. 토론토에서 의사로서 평안한 생활을 보장받은 상태였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 왔다. 그가 한국에 올 때에는 부인과 3명 자녀 그리고 임신한 아이까지 합하면 6명이 함께 왔으니 대단한 결심이었다.


1892년 안식년 중이던 언더우드를 토론토에서 만나 한국 선교 현황을 듣게 되었고, 제중원을 담당할 의사(헤론 순교 이후 적임자 물색)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당시 캐나다에는 해외 선교사 후원 제도가 없어 미국 북장로교 후원 아래 내한했다.


1893년 한국 도착 후 5개월 동안 한국어를 공부하고 제중원에서 의료 사역 및 고종의 시의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제중원은 한국 정부와 미국 선교부가 공동 운영하여 선교 활동에 지장을 받게 되자 그는 미국 선교부 단독으로 제중원을 운영하는 체제로 변경토록 건의하여 사표까지 제출하는 강수를 두어 마침내 이루어 내었다. 그래서 제중원에서 아침 예배, 기도회,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1895년 한국에 콜레라가 유행할 때 그는 방역 책임자가 되어 한국인 의학도와 함께 체계적인 방역 활동을 하였고, 다수의 의학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콜레라가 퇴치될 무렵 신분 차별 철폐법을 백정에게도 확대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여 내무대신 유길준으로 하여금 철폐 포고문을 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1899년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에 머물면서 선교대회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이때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루이스 세브란스의 재정 후원을 약속받았다. 그의 후원으로 1904년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 건립되었는데 이것이 세브란스 병원이다. 1909년 세브란스의 아들과 딸이 추가 후원하여 <사립 세브란스 의학교>가 탄생하고, 1913년 <세브란스 연합의 학교>가 되어 교파가 연합하는 의료 교육기관이 되었다.


그는 안식년을 마친 1900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의사 양성 교육을 재개하였다. 7명의 한국인 청년에게 엄격한 의료 교육을 시켜서 1908년 정부로부터 최초 한국인 의사 면허를 허가받았다. 이들이 최초 의사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백정 기독교인 박성춘의 장남), 신창희, 주현칙, 홍석우, 홍종은 7명이다. 간호사는 1906년 에스터 쉴즈가 설립한 세브란스 병원 내 <간호사 양성학교>에서 육성하였다.


1935년 20여 년 사역한 세브란스 병원장 자리를 오긍선 교수에게 양도하고, 한국인 스스로 자립적으로 병원을 운영토록 하고 76세에 일선에서 은퇴하였다. 그가 후임 병원장으로 한국인을 선정할 때 많은 선교사의 반대가 있었으나 한국인에 의한 운영체제를 굽히지 않았다.


한국인을 통한 의료 활동이 되어야만 자립적 의료가 가능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352명의 의사와 165명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1935년 12월 추운 겨울날 그가 미국으로 떠나는 서울역에는 천여 명의 인파가 몰려 그를 전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서울에서 열차로 부산으로 가서, 부산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에비슨은 교육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하여, 1915년 언더우드가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하는데 협력하였으며, 1916년 언더우드가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가자 그가 교장이 되어 활동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받았다.


그는 1916년부터 1934년까지 18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고등 교육에 헌신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는 1957년 1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을 합칠 때 첫 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그는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 플로리다 주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살다가 1956년 97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의 시신은 미국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묘비에는 <KOREA>라는 문구를 선명히 기록하여 한국에서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한국 정부는 그를 한국 의학 교육의 개척자로 인정하여, 195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상했다. 또한 연세대학교 동문회는 2009년 토론토 대학 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석탑을 세워 한국에서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그의 아들 고든 에비슨은 광주를 중심으로 YMCA 지도자 및 농업학교 교장으로 봉사하였고, 더글러스 에비슨은 의사가 되어 선천과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세브란스 병원장까지 역임하였다. 현재 세브란스 병원 내에는 역사관을 개설하여 에비슨 일가의 유물과 활동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양화진에는 네 번째 아들 더글러스 에비슨(1893~1952) 부부의 묘소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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