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 백정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분철폐 노력한 선교사

승동교회를 세워 천민과 양반이 함께 예배

by 신재천

사무엘 무어 선교사(모삼열, 1860~1906)는 백정을 전도하고, 백정의 신분 해방을 위해 힘쓴 선교사이다. 그는 한국어가 뛰어나고 진심으로 한국인을 사랑한 선교사이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주 그랜드 릿지에서 태어나서 1889년 몬타니 대학을 졸업하고 1892년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무디의 학생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고 또한 안식년을 맞아 시카고에 온 언더우드의 설교에 감동되어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는 1892년 9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당시 32세로서 부인 로즈 엘리와 함께였다. 한국 도착 후 선교사 거주 지역에서 벗어나 한강변 초가집에 거주하며 6개월 만에 한국어로 기도할 정도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오전에 20~30명에게 성경 교육을 하였고, 오후에는 마을을 다니며 순회전도 했다.


고아 6명으로 곤당골에서 학교를 시작했고, 1893년 3월 곤당골 교회를 설립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곤당골 교회는 승동 교회의 전신으로 새문안 교회에 이어 장로교 두 번째 교회이다.


곤당골에 거주하는 백정 박성춘이 열병에 걸려 아파 누워 있을 때, 그는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거처를 방문하여 병을 고쳐 주었다. 임금의 시의가 백정인 자신을 치료해 준 것에 감동하여, 박성춘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그 후 승동교회의 최초 세례자가 되었다. 박성춘은 백정 신분 철폐 운동에 앞장섰고, 1911년 승동교회에서 백정으로 최초 장로가 되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기조연설을 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한국 최초 외과 의사가 되어 간도 지방에서 개업한 후 복음을 전하였다.


교회 내 백정 출신의 성도가 늘어나자 양반 성도들이 분리 예배 혹은 좌석의 구분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성도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며 거절하여 결국 양반들은 홍은동 교회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1898년 곤당골 교회가 화재로 손실되면서 홍은동 교회로 통합하게 되었다. 양반들이 회개하면서 이곳에서 양반과 천민이 함께 예배드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무어는 이곳에서 1901년까지 담임 목사로 사역하였다.


그는 순회전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강에 배를 띄워 경기 북부, 황해도, 강원도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여 대현교회, 용산교회, 마포 동막교회 등 2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1898~99년에는 강원도를 왕래하며 6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12개의 예배 장소를 구축하였다. 그의 마지막 개척 교회가 마포 동막 교회(무어의 조사로 협력한 천광실 목사가 첫 담임목사)로서 미국 선교부에서는 동막 교회를 무어의 기념교회를 지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백정 신분 차별 철폐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성춘 등 교회 성도들의 백정 해방운동에 적극 협력하여 고종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왕의 시의인 에비슨 선교사를 통해 전달된 탄원서가 받아들여져 결국 1895년 6월 백정 신분 제도가 철폐되었다.


천민이 해방되었을 때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선언을 들었던 흑인들의 기쁨도 갓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조선 백정들의 기쁨만큼 크진 못 했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민의 신분이 해방되면서 무어는 박성춘과 함께 전국의 천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차로 수원에서 50명 대상으로 전도집회를 실시한 기록이 있다.


그는 복음의 실천을 위하여 천민과 함께한 낮은 자세의 사람이었다. 말씀을 삶에 실천하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고종 소유의 북한산 불상을 지팡이로 파괴하거나 절에 가서 불상을 두드리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에게 복음을 전하고 순회전도 활동을 허용해 달라는 면담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의 천민 전도활동과 불교와 토속 종교에 대한 강경한 행동은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었기에 그의 사역은 늘 외롭고 힘들었다. 그러나 오직 복음 만을 외치며 성경에 위배되는 토속 문화와 관습을 과감히 타파하려고 노력한 선교사였다.


1906년 12월 장티푸스에 걸려 선교 14년 만에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묘비에는 <조선인을 사랑하였고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나이다>. <저희 수고를 그치매 그 행한 일이 또한 따르나이다(계 14:13)>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비석 옆에는 1989년 승동 교회와 마포 동막 교회가 함께 세운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부인 로즈 여사는 폐결핵으로 요양차 미국에 갔다가 1902년 소천하였고, 슬하에는 3남 1녀를 두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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