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슨, 마산 복음의 선구자
마산 문창교회, 창신학교 및 의신여학교 설립
앤드류 아담슨 선교사(손안로, 1860~1915)는 호주 선교사로서 부산에서 15년, 마산에서 5년간 사역하며 경남지방 복음화에 기여했다. 부산에 거주하면서 경남 지역을 순회하며 20여 개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특히 마산 문창교회 설립하고 마산 창신 학교 및 의신 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도 헌신하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5년간(1884~89) 중국 북부지방에서 성서공회의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그리고 인도 장로교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런던 노회로부터 안수받았다.
당시 호주 장로회 선교회는 맥케이 선교사가 아내를 잃고 또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한국 선교 2년 만에 귀국하여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호주 내에서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영국 선교회로 의뢰하여 아담슨을 추천받아서 한국 선교사로 선임했다.
그는 1894년 5월 아내 엘리사와 두 딸(바이오렛과 마블)과 함께 부산에 왔다. 부산 초량에 맥케이 목사가 구입한 가옥에 거주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1895년 초량 지역에 벽돌집을 건축하여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내한한 호주 여선교사들과 마찰이 발생하였고, 또 이런 와중에 부인 엘리사가 병으로 소천하여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겼었다. 여선교사와 갈등은 목사 선교사로서 먼저 온 여선교사들을 감독하는 문제에서 생각이 달랐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집에는 나날이 성도들이 증가하였으며, 1896년 3월에는 성경 공부반을 개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1899년 안식년 때 호주로 가서 기금을 모아 1900년 초량교회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여 더 많은 성도들이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초량 교회를 사역하면서, 인근 경남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가까운 곳은 조랑말을 타고 순회 선교를 다녔고, 먼 곳인 통영과 거제는 통통배를 타고 다녔다.
양산(양산 교회, 빈화리교회), 함안(사촌 교회, 윤외리 교회, 사북 교회), 의령(서암 교회 등 7개), 고성(배둔 교회, 의성 교회), 통영(동향리 교회, 대화정 교회) 등에서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다. 1913년에는 통영 선교 지부 설립을 도왔으며, 울산, 거제 등에도 교회 설립을 직간접적 방법으로 도왔다.
특히 마산의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량에서 사역하면서도 틈틈이 마산을 방문하여 전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마지막 선교 기간인 1909년부터 1914년까지 5년간은 마산에 거주하면서 헌신하였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고, 주말에는 마산 근교 지역을 방문하여 성경을 배포하였다.
1903년 한옥을 사들여서 마산포 교회(현 문창교회)를 개척하였다. 1909년 호주 선교부는 마산 선교 지부를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아담슨의 공로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는 마산에서 교육 사업에도 헌신하였다. 1906년에 <독서숫>이란 이름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후 1909년 4년제 학교로 인가받고 창신 학교(현 창신 고교)가 되었다. 그는 1911년 8월까지 초대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 창신 학교는 1912년부터 고등학교가 되었고 9기 졸업생까지 배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과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을 때 호주 선교회가 인수하여 <호신 학교>로 학교명을 변경하였다.
1923년 붉은 벽돌 사옥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마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2층 건물로 지어졌다. 건물이 완성되면서 학교 명을 <라이얼 기념 중학교>로 명명했다. 창신 학교 2대 교장 라이얼(Lyall, 라대벽)이 1921년 순직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이다.
1913년에는 남녀공학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로 인해 의신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의신여학교는 1911년 미혼으로 내한한 맥피가 초대 교장으로 1937년까지 재직하며 학교를 발전시켰다.
그 후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는 마산 인재의 보고라고 할 정도로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였고, 마산에서의 3.1 운동도 창신 학교와 의신 여학교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었다.
아담슨는 자신의 병이 깊어짐에 따라 1914년 3월 은퇴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55세의 나이로 영국 런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부인 엘리사는 한국 온 지 1년 6개월 만에 심장병으로 소천하였다. 호주 선교사로서는 3번째 순교자(첫 번째 데이비스, 두 번째 맥케이 부인 사라)가 되어 부산 동광동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묘소는 멸실되어 찾을 수가 없고 창원시 창원대학 내 그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아담슨은 아내 소천 1년 만에 영국인 카멜라 페인(Payne, 아내의 친구)이 아담슨의 사역을 돕겠다며 내한하여 1896년 11월 그녀와 상해에서 재혼하였다. 페인은 남편의 사역을 도우고 자녀를 양육하다가 1914년 아담슨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