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 청주 복음의 개척자로 교회 및 학교 설립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등 다수 찬송가 작사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민로아, 1866 ~ 1937)는 청주 복음화의 아버지이다. 최초로 청주에 거주하며 청주 제일 교회 및 청남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찬송가 보급에 앞장서서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찬송가를 작사하였다. 현재도 애창되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등 그의 작품 5편이 새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출생하여 피츠버그 대학과 뉴욕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892년 11월 북 장로교 소속으로 부인 안나와 함께 한국에 왔다.
1893년 서울 예수교 학당(민로아 학당, 경신학교)을 맡아 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안창호 선생이 교육을 받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황해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하였다. 서울 연동교회 설립에 참여하였고, 경기도 용인군의 최초 교회인 백봉리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0년 경기도 남부지역을 순회 전도하던 중 청주 장터를 방문하고 이곳에 행상인을 중심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주 신대리에 조사 이찬규를 파견해 교인을 돌보게 했는데 그 결과 16명의 학습 교인이 등록했고 성도 오천보의 집에 예배처소가 세워졌다.
1903년 안타깝게도 아내 안나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자녀(프레드와 프랭크)가 유아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충격의 영향이었다. 안나와 두 자녀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그 후 밀러는 1904년 도티(Doty, 정신여학교 3대 교장)와 재혼하였다.
그는 1905년 2월 도티와 함께 청주로 이동하였다. 청주 선교부 설립이 인가되어 그가 개척 선교사가 되었다.
청주로 이사한 후 선교 부지를 매입하고 청주 제일교회(기존 청주읍교회)를 설립하였다.
교회가 설립된 자리는 조선시대 감옥 자리로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한 자리였는데 하나님은 그 순교의 자리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후 괴산 청천교회, 오창 건지산 교회, 조치원 교회 등을 개척하였고, 청주 산대 교회, 북일 묵방리 교회, 북일 화죽리 교회, 송파 교회에 시무하였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학교를 세우는 일에 매진하였다. 청년 교인 김원배와 방홍근과 함께 민족 운동가인 김태희의 협조를 받아 청남 학교를 세웠다. 부인 도티는 여학생 13명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청신 여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청남 학교와 청신 여학교는 후에 병합하여 현재 청주 청남초등학교로 남아 있다.
청주 외곽 시골에도 교회를 세우고 교회 안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청주 제일 교회의 청남 학교와 청신 여학교를 비롯하여 청천 교회에 청동 학교, 신대리 교회에 청서 학교, 북방 교회에 청북 학교, 괴산읍 교회에 곽산 여학교 등 총 6개의 근대적 교육 기관을 세웠다.
그는 문서 선교에도 열심을 내어 40여 종의 저서를 남겼다. 소책자와 전도지를 만들어 배포하였고, 찬송가 작시에도 참여하여 1902년까지 통합 공의회 찬송가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발행된 공인 찬송가 <찬성시>에 그의 곡이 26편이나 수록되었고, 현재 새찬송가에도 5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427장 <맘 가난한 사람>, 451장 <예수 영광 버리사>,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가 그가 창작한 찬송가이다.
두 번째 부인 수산 도티와 27년간 함께 사역하였는데 1931년 도티도 그보다 먼저 하늘나라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청주 성경학교 교장이던 딘과 세 번째 결혼하고 말년을 함께 보냈다.
1936년 70세의 나이로 선교사 직을 은퇴하고 잠시 필리핀과 중국을 여행한 후 돌아왔다. 그리고 1937년 10월 청주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시신은 자신보다 먼저 소천한 두 번째 부인 도티 여사와 함께 일신여고 교정에 안장되었다.
충북노회는 1984년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신여고에 묘비를 세워 그를 기념하고 있다. 현재 일신여고 주변에는 밀러 선교사가 거주하던 집을 포함해 선교사 거주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