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켐벨, 40대에 내한하여 배화여고 설립
서울 자교교회 및 종로교회 설립 선교사
조세핀 켐벨(강모인, 1853~1920)은 남 감리회에서 파견한 최초 여선교사로서 자교 교회 및 종교 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한 배화학당을 개교하여 여성 인재를 양성하며 평생 한국을 위해 헌신하고 이 땅 양화진에 묻혔다.
그녀는 1853년 미국 텍사스 주 웨이코에서 태어난 후 9살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하여 성장하였다. 1876년 켐벨 목사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 5년 만에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고, 두 아이마저 모두 사망했다. 홀로 된 그녀는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의 삶을 결심하고 시카고에서 간호원 교육을 받고 선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34세에 남 감리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아, 1887년 봄 중국에 도착했다. 중국 상해와 소주에서 10년간 음악교사로, 여성 병원의 보조자로, 복음 전도자로 활동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미국 남 감리회는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면서, 여성 선교사가 필요하여 켐벨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선교회 결정에 따라 1897년 10월 그녀는 40대 중년의 나이로 수양딸 노릇을 하며 함께 활동하던 중국인 여도라와 함께 내한하였다.
그녀는 한국 도착 후 남대문 남송현 선교 지부에 머물렀는데, 남송현에는 북 장로교 및 북 감리회 선교사가 다수 상주함에 따라, 남 감리회 선교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건의하여 1898년 자골 지역(현 종로구 내자동, 당시 내시들 거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사역을 시작했다.
1898년 10월 자골 지역에서 6명의 학생으로 기숙학교 형태로 자골학당을 세우고 교육을 시작했다. 그 후 기부금을 보내주는 캐롤라이나 주의 선교사 자녀 연합회를 기념하여 <캐롤라이나 학당>이 되었고, 1903년 12월 정식 인가를 받아 배화학당이 되었다.
배재학당은 성경공부를 중시하였고, 중국 고전, 수학, 지리 등 일반 학문도 가르쳤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결혼하여 기독교 가정을 꾸리거나 선교사가 되어 헌신하도록 양육하였다. 그녀는 10년 동안 초대 학당장으로 헌신했다.
1898년 자골 지역에는 윤치호가 목회하던 남송현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운영하던 윤치호가 지방으로 좌천되어 떠나고, 리드 목사가 부인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그녀는 침제를 벗어나기 위해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자골교회(현 자교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자골교회는 외형적으로는 무스가 담임 목사였으나, 그는 한국 전체 감리사로 활동하였기에 실질적으로는 켐벨이 담임하며 사역하였다. 성도가 증가함에 따라 1901년 루이스 워크 기념 예배당을 건립되었다. 1900년 종교 교회가 자골 교회에서 분리하여 추가 설립되었다. 교회의 성장에는 여도라 등 전도부인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녀는 남성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도부인 양성, 성경 공부, 병원 사역에도 헌신하였다. 그 후 1918년 고국으로 세 번째 휴가를 가서 한국 선교를 위한 강연과 후원자를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한국 여성의 경제적 도움이 되는 양계업과 양봉업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발목 부상과 간염 질환까지 앓으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
건강이 우려스러운 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1920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주위에 만류하는 지인들에게 <나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로 말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원하던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4개월 만인 11월 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67세의 일기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묘비에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13)>가 기록되어 있다. 배화여고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켐벨 기념관이 있고, 2008년 세워진 그녀의 흉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