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 목포에서 신의로 불린 의료 선교사
광주 등 전남 지역에 복음 전하다가 토속병으로 순교
클레멘트 오웬 선교사(1867~1909)는 목포, 광주 등 전남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이다.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고, 목사로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죽음과 연계되어 나환자를 돌보는 애양원이 설립되었으니, 하나님이 많이 사랑한 선교사이다.
그는 미국 버지니아 주 블랙 월넛에서 태어났다. 햄튼 시드니 대학을 마치고 1894년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189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목사와 의사의 자격을 모두 갖춘 것이다.
그리고 1897년 남 장로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11월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 도착 후 목포로 가서 먼저 사역하던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부를 개설하였다.
또한 유진 벨 사택에서 목포 진료소를 개설하여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는 각종 질병을 치료하여 목포 사람들로부터 신의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를 지켜본 목포 경감 김윤수가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김윤수는 목포 교회 건립 및 광주 선교부 설치에 적극 협력하여 선교사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로 인해 광주 나환자 사역에 기여한 최흥종도 전도 되었다. 그는 목포에서 사역하던 시기인 1900년 12월 북 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인 휘딩(Georglana Whiting, 오부인)과 결혼하여 함께 사역하였다.
오웬은 목포 사역이 성장되면서 후임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1904년 유진 벨과 함께 광주로 이동하여 광주 선교부 설립을 주도하였다. 광주 북문안 교회(현재 광주 양림교회)를 세웠고, 1905년부터 강진, 순천, 여수, 구례 등 전남 지방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1909년 3월 장흥 지방을 순회 선교하다가 고열에 시달리는 토속병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조사들이 밤새 가마로 달려 광주 병원까지 와서 치료했지만 결국 4월 3일 하늘나라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목포에서 의료 사역을 하던 포사이드 선교사가 급히 광주로 오다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나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환자를 외면하지 않고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행동하여 나환자를 데리고 병원에 도착하였다. 나환자를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이동했기에 늦게 도착했는데, 오웬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난 후였다. 그러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광주 나환자 병원인 애양원이 시작되었다.
*애양원은 포사이드 선교사의 헌신을 지켜보던 최흥준이 선교사의 헌신에 감동하여 자신의 땅 천 평을 기증하여 나환자 수용소를 시작하였다. 그 후 환자가 많아지고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애양원은 1926년 여수로 이동하였다. 여수 애양원은 손양원 목사님이 시무한 곳이기도 하다.
오웬의 장례식은 프레스톤 선교사가 집례하고, 광주 양림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는 광주 양림산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된 것이다. 부인 휘딩은 한국에 계속 남아 4딸을 키우며 신규 부임한 선교사의 정착을 도우며 사역하다가, 192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광주 양림 교회에는 오웬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양림동에는 오웬 기념각이 세워져 광주 문화 행사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