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트, 황해도 재령 선교의 아버지
명신학교 설립 및 최초로 중국에 한국인 선교사 파송
윌리엄 헌트(한위렴, 1869~1953) 선교사는 황해도 재령 선교부를 개척한 재령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재령읍 교회 건축, 명신학교 설립하고 최초로 중국 산동에 한국인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는 미국으로 이주한 영국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1897년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에 머물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평양의 서쪽 지역인 황해도에 복음울 전하기 위해 재령 등 지역을 정기적으로 순회전도를 실시하였다.
당시 재령은 읍 단위 소도시였으나, 농산물과 수산물이 집결하는 요충지로서 천주교가 거점으로 자리 잡은 도시였다. 그래서 천주교 신도들이 기독교인의 전도활동을 방해하여 기독교인을 구타하는 사건이 빈번했는데, 1903년 15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로 압송된 후 잠잠해질 정도였다.
헌트는 재령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였고, 기존 재령읍 교회(모펫설립, 이후 재령 동부교회)를 새로 건축하고, 사경회와 성경 공부반을 운영하였다. 1905년 쿤스 부부와 화이팅 부부(의료 선교사)와 함께 한 달간 재령에 거주하면서 주택과 병원 자리를 모색하였고, 1906년 재령 선교부를 설치하였다.
교육 사역도 활발히 전개했는데 1895년부터 재령읍 교회에서 시작된 성경 공부 과정이 있었다. 헌트는 이 과정을 학교로 확대하고 1898년 명신학교로 인가받았다. 남녀가 함께 공부하였고, 이곳에서 많은 기독교 인재를 양성되었다.
1912년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 해외 선교를 결정하면서, 선교지 선정하는 일이 헌트에게 맡겨졌다. 그는 중국을 방문한 후 산동지역을 선교지로 결정하고 1913년 그를 돕던 박태로 목사 등 3명을 장로교 최초로 해외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일제 치하 속에서도 산동지방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선교의 지평을 연 것이다.
재령읍 교회는 성도가 많아짐에 따라 1922년 재령 서부교회를 분리 개척되었다. 또한 헌트는 인근 시골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결과 교회와 성경학교를 설립되었다.
그는 모펫과 함께 장로교 신학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칼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새 신자에게는 성경 및 교리교육을 통한 양육을 중시하였다. 장로교단이 복음 전도와 선교 지향적 교회가 되는데 기여하였다.
1939년 10월, 70세에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3년 84세의 일기로 뉴저지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아내 베르타(Bertha)는 1868년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서 음악을 공부하였다. 약혼한 상태였던 그녀는 헌트보다 1년 늦게 1898년 내한하였고, 한국으로 오는 도중 일본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내한 후 숭실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쳐서 한국 서양음악의 개척자인 김인식을 키워냈다. 그러나 내한 7년 만에 평양에서 소천하였다.
두 번째 아내 안나 로이드는 재령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로서 헌트의 1남 3녀의 자녀를 양육하며 남편의 선교를 도왔다. 그녀는 헌트가 은퇴할 때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헌트와 베르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부루스 헌트 (한부선)는 1928년부터 내한하여, 먼저 청주에서 사역한 후 1936년 하얼빈에서 활동했다. 1938년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반대를 공개적으로 외친 선교사이고, 장로교 고신파의 신앙윤리와 좌표가 된 <언약문서>를 만들었다. 신사 참배 반대로 투옥된 옥중에서 일화를 모은 <언약의 노래>를 책으로 출간하였고, 또한 해방 후 부산에 고려 신학교를 설립한 선교사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