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모어, 평북 선천을 기독교 도시로 만든 선교사
신성학교 및 보성 여학교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
노먼 휘트모어 선교사(위대모, 1870~?)는 평북 지역에 복음을 최초로 전한 개척 선교사이다. 그는 한국 최북단 도시 선천을 중심으로 선천읍 교회를 세우고, 신성 학교, 보성 여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하였다.
* 선천은 평북의 선교 중심지이며, 여기를 통해 북방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곳은 초기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대부분 사람들이 기독교 성도였다. 또한 선천 신성 학교를 중심으로 민족 운동이 일어났고, 1911년 105인 사건 및 1919년 3.1 운동의 핵심 거점이 된 곳이다. 선천 지역에서 양전백, 백낙준, 방효원, 방지일 등 많은 기독교 목사가 배출되었다.
그는 1870년 6월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뉴욕 파크 대학과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1896년 10월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내한 후 한국 생활에 적응한 후 선천으로 배속되었다. 1897년 봄 처음 선천을 방문한 이후 정기적으로 순회 방문하며 1898년 선천읍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0년에는 남만주 지안에 있는 《이양자 교회》를 재건해 달라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요청에 따라 휘트모어와 안승원이 가서 재건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해서 지안의 교회를 봉사하였다. 이것이 중국을 지원한 장로교의 최초 선교 활동이다.
그는 1901년 선천 선교부를 개설하고 선천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의사 샤록스(A. M. Sharocks, 사락수)도 함께 선천에 상주하며 환자를 치료하였다. 1902년에는 그의 조사 양전백을 선천읍 교회 장로로 세워 기독교 복음화 및 민족운동의 기둥이 되게 하였다.
* 양전백 목사(1870~1933)는 1896년부터 휘트모어의 조사가 되었다.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기로 졸업하고 장로교 최초로 목사 안수받았다. 자가 되었다.
그는 선천으로 돌아와서 휘트모어를 도우는 사역을 하였다. 3.1 운동의 핵심 인물인 33인 중 한 사람이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성 중학교가 민족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컸다.
휘트모어는 1902년부터 의주 지역을 중심으로 북방 선교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강계, 만주 지역을 방문하고 일대에 복음을 전하는 등 평북 지방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선천에 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인재를 육성하였다. 1906년 선천에 신성 학교를 설립하여 휘트모어가 초대 교장으로 헌신하였고, 북 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마련하였다. 1907년 보성 여학교를 세워 여성에게 교육하였다.
* 신성 중학교는 1909년 교육 선교사 매쿤의 교장 부임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매쿤은 이 학교에 다니던 백낙준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서 문교부 장관이 되게 하였다. 또한 매쿤은 숭실대 학장 시절 신사참배 운동을 끝까지 반대하여 추방당한 선교사이다.
선천에는 1905년 의사 샤록스에 의해 미동 병원이 설립되어 환자를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여 성도가 나날이 증가하였다. 1911년 선천읍 교회에 성도가 많아져 예배당이 좁게 되자 선천 남교회를 분리 개척되었다. 그 후 1930년대에는 선천 중앙교회, 선천동 교회 등 여러 교회가 추가로 분리 개척되었다.
휘트모어는 1929년까지 선천에서 사역한 후 서울 선교지부로 이동하여 조선 예수교 서회 총무로 일하면서 기독교 문서 선교활동에도 헌신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6년간 헌신한 후 1935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선교 이야기는 책 《위대모와 평북 기독교》에 기록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