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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에드먼즈, 최초로 간호사를 양성한 선교사

이 땅에 간호사 용어와 복장을 설정한 선교사

by 신재천

마가렛 에드먼즈 선교사(1871~1945)는 1903년 12월 보구여관에 최초로 간호사 양성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간호사를 양성을 시작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 스미스폴즈에서 태어났다. 1892년 12월 미시간 대학교 간호원 양성학교를 입학하여 2년의 실습과정을 마친 후 간호원이 되었다. 그 후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7년간 간호원으로 일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산모 및 어린이 등 도시 빈민을 돌보았고, 친근하고 책임감이 강한 간호사로 인정받았다.


그녀의 한국 선교 동기는 커틀러 선교사의 강연 때문이었다. 1900년 당시 한국 보구여관에서 사역하던 커틀러 선교사가 톨레도의 교회를 방문하여 강연하였는데 한국에서 간호사를 양성할 전문인이 필요하다고 강연한 것이다. 그 후 커틀러와 개별 면담을 통해 한국 선교를 결심하였다.


그녀는 톨레도 감리 교회의 후원을 받아 1902년 9월 뉴욕 항을 출발하여, 런던과 지중해를 거쳐 6개월의 여정 끝에 1903년 3월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감리회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03년 12월 보구여관에 간호사 양성학교를 설립하여 5명의 학생을 받아 간호사 교육을 시작했다. 먼저 간호사 복장으로 연한 청색 상의와 흰색 치마를 선정하였고 간호사 규칙 책자를 번역하여 간호사의 임무부터 가르쳤다. 그리고 nurse의 한국어를 <간호원>이란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선교부 자료에 그녀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조용하고, 강하고, 유능하고, 숙녀답고, 사교적이고, 일을 피하는 법이 없다.> 그녀의 이런 성품으로 한국에서 첫 간호사 양성학교가 출범한 것이다.


그녀는 전인 교육에 중점을 두었고, 봉사하는 간호원으로 양성하였다. 1906년 첫 한국인 간호사 2명 (이그레아스, 김마르다)이 배출되었다. 보구여관에서는 2년간 간호사가 배출되었고 그 후 쉴즈가 운영하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양성되었다.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사 양성 학교를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06년 쉴즈가 세브란스 병원에 간호사 학교 설립을 추진하자 보구여관의 교육 과정을 알려주고 협력하였으며, 상호 수업을 교류하였다.


그녀는 1908년 한글로 <간호교과셔>를 번역 편찬하였고, 쉴즈와 함께 1908년 3월 <대한 졸업간호원회>를 조직하여 간호사간 정보교류 모임을 만들었다.


그녀는 1908년 9월 해리슨 목사와 결혼하고 군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간호원 양성학교는 쉴즈 선교사가 운영하게 되었다. 그녀는 20년을 호남 지방에 거주하며 남편의 사역을 도왔고 동시에 군산 구암 예수 병원에서 간호원 양성에 헌신하였다


* 해리슨 선교사는 1894년 내한하여 군산 등 호남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첫 부인인 린니 데이비스의 소천 후 혼자 지내다가 에드먼즈를 만나 재혼했다.


1928년 남편이 사역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그녀도 함께 귀국했다. 그리고 귀국 2달 만에 남편이 소천하는 슬픔을 겪었다. 미국에서 한국 간호사 양성 경험을 책 《The Mustard Seed》에 기록하여 남겼다.


그녀는 아들이 거주하던 노스 캐롤라이나 무어스빌에 거주하다가 1945년 10월 74세로 소천하였다. 한국 광복의 모습을 보고 또한 그해 아들 결혼식을 참가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의 시신은 미국 켄터키 주 레바논 시 묘지의 남편 옆에 합장되었다.


한국 정부는 그녀의 간호사 양성 공로를 인정하여 2015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고인이 된 그녀를 대신하여 가족이 대신 수상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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