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었던 어린 시절
누군가 나에게 "어릴 때는 어땠어요?"라고 물으면, 나는 망설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나를 알게 되고 동정하거나 아니면 편견을 가질까봐서 아니면 그냥 그런 티 내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심지어 더 어릴때에는 그런 시절이 없었던 것 처럼 마치 풍요롭게 자란 사람처럼 거짓말하기도 했다. 몇년전 내가 샌프란시스코서 살고 있을때 동생이 잠시 놀러 와서 우리는 나파 밸리로 가서 드넓은 포도밭을 배경으로 와인잔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우리는 진짜 부잣집 딸래미들처럼 귀티나보이고 행복해보였다. 나는 너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우리 진짜 누가 보면 부잣집 딸래미들 같겠다.ㅋㅋㅋㅋㅋ” 우리는 이내 눈을 마주쳤고 그런 과거는 다 잊은 듯 잊지 못한 듯 킥킥대면서 웃었다. 우리는 지금의 풍요로운 현실 앞에서 과거의 결핍을 딛고 일어나 안락한 웃음을 지었다.
나에게는 지금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그런 결핍의 시간이 있었다. 그 결핍이라는 단어 조차 모르는 어린 나이에 겪은 그 강렬했던 결핍에 대한 경험은 어른이 된 지금도 종종 바람처럼 스며들어 눈시울을 붉히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등감이나 자괴감들로 뭉쳐져 벽처럼 나를 가로 막기도 한다. 모든걸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이 생긴 어른이 된 나에게조차 종종 잊히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경상도 의성. 작은 읍내. 엄마 등에 업혀 동네 아주머니들과 마실 나갔던 기억, 소소하지만 아빠 오토바이에 올라타 풍경을 가르며 달렸던 기억, 마당 앞에서 신발을 벗고 흙바닥을 밟던 기억. 그 시절은 사진처럼 따뜻한 톤으로 남아 있다.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의 우리 가족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세명이 그런대로 살아가기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빠는 나라에서 쫒고 있는 그런데 시골로 잠적한 ‘요주의 인물’을 검거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아빠는 우리나라 어느 도시로든 전근을 갈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엄마와 아빠는 고심끝에 수원 공군에 재직 중이었던 둘째 큰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수원으로 이사를 왔다. 도시로의 이사는 ‘더 나은 삶’으로의 선택처럼 보였다. 좋은 교육이 있는 학교에 다니고, 더 큰 놀이터에서 놀고, 더 멋진 집에 살게 될 줄 알았다.
한두해가 지나고 동생이 태어나고 우리는 도시에 그렇게 적응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촌에서 올라온 성실하고 착했던 아빠는 예전의 아빠가 아니었다. 술 냄새가 잦아지고, 표정이 거칠어지고,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어린 나는 이유는 모르지만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말다툼은 소리로, 소리는 결국 손으로 번졌다. 밤이 되고 술취한 아빠가 집에 오면 집 안은 늘 폭풍 전야 같았다. 그 불안한 공기 속에서, 나는 여덟 살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피아노도 배워보고 구몬도 해봤지만 미술학원이 제일 재미있었고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달 되지 않아, 전국그림대회에 내보낼 그림을 그렸다. 내 그림은 도로 위에서 교통을 정리하는 경찰 아빠의 모습이었다. 나는 정말 정성껏 그렸다. 예전의, 자랑스러웠던 아빠를 기억하며. 아침에 전교생이 모이는 조회시간인데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내가 그 그림대회에서 상을 탔기때문에 앞으로 나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런 큰 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조선일보에 내 이름이 새겨졌다. 나는 들떠서 상장과 상패를 가방에 고이 넣어 집으로 손쌀같이 달려갔다. 혹시 이 기쁜 소식이, 우리 집에 잠시라도 행복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싶어서. 진짜 예상했던 대로 엄마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갑자기 호랑이처럼 달려와 날 껴안으며 날 깨물기도 하였고 눈물도 흘렸다. 나는 왠지 그동안 울기만하고 아빠랑 싸우기만 하는 엄마를 이렇게 행복하게, 그리고 웃을 수 있게 했던 내 자신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내가 받은 이 상이 아빠에게도 전해저 예전처럼 행복하고 착한 아빠가 다시 되어서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술을 마시고 늦은 밤에 들어온 아빠는 다시 엄마와 싸웠고, 이번엔 훨씬 더 무서웠다. 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나는 동생과 함께 방에 갇혔다. 벽을 뚫고 들려오던 엄마의 비명, 깨지는 그릇 소리, 고함. 나는 동생의 귀를 막고 이불 속에 웅크렸다. 이웃에서도 소리를 듣고 신고를 했는지 경찰이 왔다. 나는 안도했다. 드디어 어른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하지만 아빠는 본인도 경찰이고 주의하겠다고 했고, 그 경찰들은 “문제 없으시죠?”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현관문이 닫히고,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순간, 나는 어린 마음에 내 힘으로 어떻게 할수 없는 이런 상황자체에 대한 무력감이 밀려들어 혼자 벽을 긁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제발 엄마를 그만 괴롭히기를… 무섭게 변해버린 아빠와 당하기만 하는 엄마 사이에서 나는 어떤것도 할수 없이 눈물만 흘렸다. 나는 진심으로 힘이 없었다. 어떤 울음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아빠는 조용히 신발을 신고 나갔다. 거실엔 부서진 그릇들과 찢긴 소파가 남아 있었고, 엄마는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닦으며 파편을 주워 담고 있었다. 엄마는 머리를 잡아당겨져 두피에는 피가 맺혀있었고 얼굴은 아빠에게 맞은듯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며칠 후, 엄마는 결심한 듯 우리를 데리고 아빠의 직장인 경찰서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숙직실에 남겨졌고, 엄마는 우리를 짐처럼 맡기고 떠나버렸다.
“독한 여자야. 애들을 저렇게 두고 가다니…”
어른들의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나는 잠든 척하며 동생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손을 놓치면, 내가 지켜야하지만 또 내가 의지하고 있는 동생마져 사라져 버릴까봐.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다음날 휴가를 내고 우리를 데리고 대전에 대구에 있는 친척집 들을 돌아 다니며 우리를 잠시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하루는 여관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식당에 내려와 아빠, 나 그리고 동생이 아침을 먹으려고 기다렸다. 식당 아줌마는 “엄마는 어디있어?”라고 물었더니, 아빠는 ‘내가 아빠고 엄마예요’라며 멋쩍은듯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이제 엄마는 어디간거지? 어른들은 설명도 없이 그런 상황에 나를 내몰았고 나는 그냥 그 상황과 현실에 놓여 있을 수 밖에 없는 어린 아이였다. 8살 그리고 3살 여자아이 둘은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그리고 친척집 어디든 커다란 짐이었다. 누구도 그렇게 말은 안 해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빠는 나에게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자식에게 무자식이 상팔자라니.. 정말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내 스스로가 진짜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것같아 서글퍼졌다.
그러던 아빠는 나를 자식이 없이 혼자 사는 어느 미용실 아주머니에게 입양을 보내고 동생은 고아원에 맡기려 했지만 다행히, 시골에 계시던 큰엄마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시골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결국 나와 동생은 경상도 깊은 시골, 큰집에 맡겨졌다.
그 집은 정말 옛날 기와 집이었다. 아직도 겨울이면 가마솥에 장작불을 떼서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옛날 기와집, 장독대가 마을 중앙에 있고 비가 오면 흙으로 된 마당에 큰 웅덩이가 생기고 가을이면 마당에 있는 큰 감나무에서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그리고 매일 아침 옆집에 있는 수탉이 꼬끼오를 너무 크게해서 6시에 강제 기상을 해야하는 그 시골집에는 할아버지와 큰엄마, 고등학생 사촌언니가 살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장손의 며느리로 시집와서 시골에서 고추농사를 지으며 사촌 언니 오빠들을 다 키우고 큰아버지는 지병으로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상태였고 게다가 연세가 80이 넘으신 정정하시지만 무릎이 안좋으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계셨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에 큰집에 맞겨진것이었다. 당연히 짐덩이 둘이 왔으니 세탁기도 없어서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는 이 시골에서 엄마를 고생시킬 막내언니는 우리를 벌레를 보듯 싫어했다. 첫 일주일은 큰엄마와 언니와 방을 같이 쓰다가 우리를 너무 싫어하는 언니때문에 결국 우리는 할아버지 방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학교를 등원하려면 아침에 6시 50분 / 7시 30분 차를 놓치면 지각이었다. 큰집은 시골 산골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차를 차려면 비포장도로로 되어 있는 시골길을 25분 정도 굽이 굽이 걸어 큰길로 나와야 그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다행히 동네에는 내 또래와 언니 오빠들이 많아서 나가는 길은 나쁘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올때 조금이라도 늦으면 산소도 있고 산골짜기에다가 가로등도 별로 없는 시골이어서 해가 져 버리면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이 정말 무서웠다. 그럴때면 나는 있는 힘껏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달려갔다.
내가 학교를 가는 동안 동생은 농사일을 하시는 큰엄마를 따라 다녔다. 꼬질꼬질하게 세수도 안하고 일어난 내복 그대로 큰엄마를 따라 나서도 밭에서는 아무도 놀아주는 사람이 없었을거다. 그러다보면 혼자 풀이랑 돌이랑 놀다 무덤가에서 잠이 들기도하고 정말 많이 심심 했을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동생이 울며 말했다.
“나도 언니랑 학교 갈래…” 동생을 타일러도 굳이 나를 따라 가겠다는 거였다. 조금 놀아주는 척을 하다가 버스를 놓칠 걱정에 나는 끝내 동생을 길에 두고 달렸다. 동생은 대성통곡을 하며 내 뒤를 따라왔다. 그 꼴을 보던 밭에서 일하던 동네 아주머니가 동생을 안아주지 않았다면, 그 시골길을 끝까지 따라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울음을 꾹 참으며 등을 돌려 달렸다. 그때 나는 왜 그토록 학교를 가려고 달렸을까.. 어른이 된 지금도 후회하는 기억이다. 학교보다 동생을 챙기지 못한 나의 작고 약한 마음 그리고 우는 동생을 미련하게 무참히 무시하고 달려가던 그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엄마가 백화점에서 보내준 예쁜 흰색 원피스는 "흙 묻는다"며 입지 못했다. 밥상 위엔 김치와 단무지만 있던 날이 많았다. 내가 먹고 쓰고 행하는 모든 것이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눈치보다도 더 깊게 밀려왔던 건, 처절하고 처절한 외로움과 내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런 감정이 커질때마다 작용 반작용의 물리 법칙처럼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싶었다. 그토록 나를 사랑해줬던 엄마와 아빠가 참으로 그리웠다.
나는 많은 밤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도했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죽지 않게 해주세요.
다시, 꼭 아빠를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아빠가 우리를 빨리 데리러 오게 해주세요…”
누구에게도 닿지 않더라도, 그 마음을 하늘에 띄웠다.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사랑을 기다리는 아이로.
그 시절은 참으로 결핍된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단단한 나를 만든 경험이기도 했다. 그 어둠 속에서도 더 나은 현실을 위해 기도하던 그 아이 덕분에 지금 여기 있다. 그때의 나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대견하다. 숨을 죽여 살던 그 밤들에도,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사랑을 기다렸던 그 마음에.
그런 결핍은 나를 망가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단단하게, 더 깊게 나를 빚었다는 걸…
이렇게 지나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