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튼튼해질수록,
마음도 단단해졌다.

by 신정원


초등학교 4학년, 아직은 학교가는 것이 재미있던 나이였다. 겨울 방학을 마치고 아직은 입김이 코를 따뜻하게 그리고 시리게 하는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내 자리에서 조용히 새로 만난 반친구들을 훑어보며 마음속으로 작게 말 걸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 조회시간이 끝나고 자유롭게 서성거리던 아이들 사이로 무섭게 교실문이 벌컥 열렸다.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노총각 체육 선생님이 우리 반 교실로 성큼 들어왔다. 그 뒤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목소리가 큰 호랑이 처럼 생긴 나이든 핸드볼 운동부 코치 선생님이 따라 들어왔다. 코치 선생님은 눈썹이 짙고 입매가 단호한, 목소리만으로도 아이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말 그대로 위압감의 실체였다. 엄청 큰 소리로 교실이 쩌렁 쩌렁 울리게 소리질렀다. “야, 남자애들은 다 앉고 여자애들만 일어나 봐.” 어리둥절한 채로 우리는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섰고, 선생님은 꼼꼼하게 우리를 훑어보더니 나를 포함한 몇명을 손가락으로 지목하기 시작했다.“너, 너, 너… 점심 먹지 말고 운동장으로 나와라.”


말투는 너무 당연하고 단호했지만, 상황은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왜? 뭔데? 점심은 왜?...

모두 얼굴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로의 눈만 쳐다봤다. 대체 뭘까??? 왜 날 오라는거지…


드디어 궁금함을 없애줄 점심시간이 되었다. 호명 된 우리는 마치 잘 못해서 불려나간 억울한 얼굴로 운동장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우리 반뿐 아니라 다른 반에서 지목된 아이들도 있었다. 공통점은 키가 크다는 것. 운동장 계단에 줄줄이 앉아 있으니, 노총각 선생님이 젠틀한 미소를 띄며 드디어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여자 농구부가 새로생기는데, 경상북도에 여자 초등 농구부가 한 팀도 없어서, 우리 학교가 만들면 곧바로 경북 대표 팀이 될끼다.” '경상북도 대표'라는 말은 그때의 나에겐 설레면서도 어리둥절하고, 어쩐지 멋있게 느껴지던 말. 그때까지만해도 그런 타이틀이 동아리 가입하듯이 가입하면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의성에는 그 당시 전국구 실력을 자랑하는 여자 고등학교 농구팀이 있었다. 고작 여섯 명의 팀인원으로 (농구가 5명이 하는 게임이니 후보1명을 데리고) 열악한 환경에서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던 여자 농구부 언니들이 의성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육청에서 지역 차원에서 여자 농구 꿈나무를 키우자는 명목으로, 우리도 ‘무슨 대표’가 되게 생긴 것이었다.


거기에 그 시절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방송 중이었다. 농구는 그 자체로 스타였고, 나도 전주만 들어도 가슴벅차오르던 노래가 흐르는 드라마 속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에 푹 빠져 있었던 터였다. 마침 딱 맞게 나의 호기심은 농구부로 말려들었다.

그날 체육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학교 근처 돼지갈비집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도 꽤나 전략적인 회유였다. 당시 우리 집 밥상에서는 쉽게 맡을 수 없던 고기 냄새가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농구하면 체력도 중요하니까 매주 고기 회식도 있고, 운동복이랑 운동화는 나라에서 다 나와. 겨울엔 잠바도 준다. 이거 봐라. 나이키다. 멋있지?”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운동복이 담긴 종이가방과 빨간색 농구가방을 어깨에 멘 채 운동장에 서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경상북도 대표 여자 농구부 선수가 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되어졌다’에 가까웠다.

이후 농구부 소식이 퍼지자 학교는 들썩거렸다. 아마도 드라마의 여파에 남자 아이들은 누가 농구부가 되었는지 알아보고 다녔고 나도 왠지 부끄러웠지만 그런 관심과 주목이 기분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키는 작지만 농구가 너무 하고 싶은 2명이 자진해서 지원해서 들어왔다. 처음엔 대략 20명이 넘는 아이들과 한팀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사실 초기에는 바로 농구를 시작하기 보단 기본 운동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악몽같은 훈련에 가까운 일정이 매일 반복되었다.


등교하자마자 자율학습은 빠지고 운동장 20바퀴를 돌고, 4교시까지만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자마자 체육관으로 이동해 코트 40바퀴, 오리걸음, 점프, 드리블 훈련이 이어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주말엔 구봉산 등산이었다. 의성에 있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줄지어 있는 산. 한번 들어가면 아홉봉우리가 끝날때까지 울며 뛰어야만 했고, 산을 오르내릴 때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처럼 후들거렸다.


아이들은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엄마가 반대해서…”, “학원 가야 해서…”, “집이 멀어서…” 이유는 각자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저히 버티기 힘들었던 거다. 그렇게 하나둘 떠난 자리에,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이 남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고기 회식이 좋아서였는지, 새 운동화가 아까워서였는지, 아니면 지금껏 쌓아온 코끼리 다리가 아까워서였는지. 분명한 건, 우리는 그 모든 시간을 견뎠고, 서로를 응원하며 버텼다는 것이다.


처음엔 내다리는 가늘고 힘없는 느낌이었는데, 운동을 시작 하고 나서는 확실히 몸에 대한 자신감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겼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각선미 있는 다리는 아니지만, 땅을 박차는 근육, 쓸모 있는 허벅지, 누구보다 빨리는 아니지만 멀리 그리고 오래 뛸 수 있는 코끼리 다리가 생겼고 체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어느 순간 내가 아무리 뛰어도 뛰는걸 내가 원하는 만큼 아니 얼만큼인지 모를 정도로 계속 뛸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각선미’는 여전히 내게 없지만 땅을 튕겨내는 근육이 생겼고, 쓸모 있는 허벅지가 자리를 잡았으며, 누구보다 빠르지는 않아도 누구보다 오래 뛸 수 있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줄 수 있는 몸과 나만의 자랑스러운 ‘코끼리 다리’를 갖게 됐다.


그런데 좋아진건 체력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달라졌다. 집에선 늘 조심조심 소심하게 남의 눈치만 살피면 쥐죽은듯이 지내던 내가, 농구 코트에선 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의 빈틈도 놓치지 않고 치고 나가고, 코트가 떠나갈것 처럼 목이 터져라 화이팅 응원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정말 운동이란, 몸이 튼튼해지면서 동시에 자존감도 튼튼해지는 일이었다. 어느새 나는 운동을 통해 나 스스로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고, 그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경험이었다.


성인이 된 나는 이제 운동선수처럼 훈련은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코끼리 다리를 가지고 있다. 우두커니 앉아서 내가 원하는걸 얻을때까지 집중할 수 있는 근성과 체력. 이 다리는 나를 내가 원하는 나에게 더 가깝게 만들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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