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북 일상, 두렁 마을
나는 도시에서 21년을 살았다.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들과 반짝거리는 전광판, 까만 아스팔트 도로가 내게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매일 같은 풍경을 20년 넘게 보다 보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자극이 있는 곳에 살고 싶었다. 당시에 시골은 나의 선택지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외국으로 이민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해 이런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꾸게 된다.
2017년 11월 15일. 포항에 지진이 일어났다. 땅에서 올라오는 진동에 몸이 휘청거리고 제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다. 가족 모두 지진 트라우마가 심했지만, 23층 높이에서 혼자 지진을 겪은 아빠는 특히 트라우마가 심하셨다. 지진 후, 한동안 가족 모두 거실에 모여 외출복 차림으로 잘 정도로 지진에 대한 공포가 컸다. 이때 처음으로 부모님께서 귀농을 언급하시며 시골로 이사를 가는 것이 어떻냐는 이야 기가 오갔다. 그러나,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귀농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외국으로의 이민만 생각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후, 2019년 코로나가 터졌다. 당시 나는 독일어문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독일 은 물론이고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무척 어려워지면서 진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나는 독일어를 계속하는 것에 대해 확신이 안 서서 전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질 때까 지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휴학한 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슬럼프가 찾아왔다. 한 번 도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막 상 내게 무한한 시간이 주어지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엄마는 10년 동안 하시던 공인중개사 일을 접으시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귀농 준비를 해야겠다고 결정하셨다. 엄마는 귀농귀촌 교육을 듣기 시작해 1년 동안 교육 160시간을 이수하시고, 귀농귀촌 지원사업을 신청했다. 엄마는 2020년 11월부터 기계면에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휴학으로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엄마와 함께 땅을 보러 다니며 시골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땅 계약은 괜찮지 않았다. 계약하려는 족족 모두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우리는 정말 절망적이었다.
그러던 중 2021년 1월, 외삼촌께서 기북면에 땅이 나왔다는 연락을 주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기북면이 고향이었지만 거리가 멀어서 귀농지역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무런 기대 없이 땅을 보러 갔다. 그런데 땅을 본 후, 부모님과 나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부모님은 위치도 좋고, 귀농 조건에 딱 맞는 지역이라 마음에 쏙 들었지만, 나는 땅 주변에 있던 산소들을 보고 기겁했다. 부모님 은 그 자리에서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나는 꼭 그곳에 가야 하냐고 하루 종일 울면서 극구 반대를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의사는 매우 강경했다.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땅을 계약하게 되었고, 그 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결국 나는 체념하고, 새로 지을 집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그러나 계속 아파트에서 살아서 집을 어떻게 짓는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먼저, 인터넷과 책을 열심히 뒤졌다. 우리 가족이 쓸 집이니 가족들의 생활 패턴이나 필요한 요소들을 고려해 최대한 가족 맞춤형 집으로 설계하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와 일주일 동안 줄자를 들고 치수를 재며 계속 상의했다.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하다 보니 점점 재미가 생겼다.
그 이후, 직접 설계한 대로 공사가 시작되고, 부모님과 나는 집이 지어지는 것이 너무 설레고 신기해서 매일같이 현장에 방문했다. 나는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과정을 기록했다. 공사하시는 분들과 현장에서 필요한 부분을 조율하며, 집이 어떻게 지어지고, 왜 이 과정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나누니 집에 대해 더욱 애정이 생겼다. 그렇게 우리는 순조롭게 이사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집이 다 지어지려면 적어도 2~3개월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공사는 3월 초부터 시작했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일 때문에 3월 말에 이사를 해야 했다. 부모님은 부랴부랴 공사 기간 동안 살 집을 구했고, 결국 기계면의 작은 원룸을 구하게 되었다.
3월 말에 이삿짐은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두고, 우리는 필요한 것들만 챙겨 원룸으로 갔다. 원룸 생활 첫날, 가족은 모두 절망에 빠졌다. 한 번도 같은 공간 안에서 24시간 동안 생활해 본 적이 없었기 때 문이었다. 더구나,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날 저녁 “앞으로 한 달을 어떻게 버티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한 달 동안 시골의 원룸에서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 힘들었다. 그래서 모두 이사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5월 초, 드디어 집이 완공되었다. 우리는 원룸에서 탈출하듯 바로 기북으로 이사를 했다. 좁은 원룸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2층 주택으로 가니, 대궐이 따로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귀농에 빨리 적응한 것 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귀농으로 인해 불편한 모든 것들이 집 하나로 모두 용서되었다. 당시 우리의 마인드는 “거리? 멀어도 상관없어! 차 타고 나가면 금방이야!” “배달? 안 돼도 상관없어! 직접 해 먹으면 되지!”였다. 오히려 이런 마음을 가지니 더욱 귀농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내 공간, 내 방이 생기니 산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북으로의 이사 첫날, 동생과 나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마음에 자축하는 의미로 테라스에 나가 작은 파티를 열었다. 의자를 펼쳐 놓고 넓고 탁 트인 공간을 만끽했다. 그러다 우연히 하늘을 보았는 데, 하늘에 별이 촘촘하게 수놓아진 것처럼 가득했다. 늦은 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밤바람에 부딪혀 나는 나뭇잎 소리,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 나는 아직도 그때의 경관을 잊을 수 없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빛 하늘을 보곤, 나는 기북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후, 나는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기북에서 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구석구 석을 돌아다니며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기록했다. 첫눈에 반한 밤하늘부터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다랭이논, 논둑에 핀 예쁜 꽃, 푸릇푸릇한 청보리, 가을이 되면서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 비 온 뒤 푸른 하늘, 옥녀봉 뒤로 붉게 물든 노을까지 기북의 사계절을 카메라에 담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취미였는데, 점차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농정원에서 하는 귀농귀촌 동네 작가도 신청해 기북의 풍경을 찍어 SNS에 올리며 기북에 대한 애정을 키워갔다.
그리고 기북에는 풍경 외에도 멋진 것들이 무척 많았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기북만의 “냄 새”다. 냄새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영향력은 꽤 센 편이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꽃내음과 풀내음, 봄바람 타고 불어오는 바람 냄새, 아궁이에 불 때는 냄새, 비 오면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모두 도시에서 맡을 수 없는 시골만의 정겨운 추억의 냄새다. 이 외에도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이렇게 기북에서 살아가면서 이곳을 기록하다 보니, 내가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 인지 찾게 되었다. 한 유명 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직업은 명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사로 끝나야 한다.”라고 하였다. 과거의 나는 직업을 명사로 쓰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다양한 일에 도전하고, 마을에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내가 되고 싶은 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