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며, 하늘을 날다.

[하프마라톤 완주, 그날의 기록]

by 매력덩

“지금 아니면 못 뛴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시작하면 어떻게든 길이 생기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변명만 생긴다.

이번엔 10킬로가 아닌 하프다.
뛰어서 두 자릿수를 찍어본 적도 없는데, 과연 내 몸이, 내 의지가 이 거리를 버텨낼 수 있을까.
그걸 시험해보고 싶었다.

불가능은 어쩔 수 없지만, 그걸 빼면 다 가능하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은 만류했다.
“몸 상해.”, “제정신이야?”
걱정 같지만 결국은 포기하라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나의 목표를 가로막는 그 어떤 말에도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내 한계를 넘어보고 싶었다. 인생도 결국 마라톤이니까.

복잡하게 따질 필요 없지.. 뭘 따져. 그냥, 뛰면 된다.




출발선에 도착했을 때,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형광 러닝복, 쿠션화, 고글. 복장만으로도

“나 오늘 뛸 거야. PB(personal best 기록) 찍을 거니까 말라지마.” 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어떤 이는 코스튬을 하고 나왔는데, 고양이 귀를 쓴 젊은 여성 러너가 특히 눈에 띄었다.

보기만 해도 귀여웠다. 순간 생각했다.
‘나도 조금만 더 일찍 달리기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이도, 삼삼오오 모여 스트레칭을 도와주는 이도 있었다. 화장실 앞은 줄이 길게 늘어섰고, 긴장된 공기가 서서히 몰려왔다.

“5, 4, 3, 2, 1.”
휘슬이 울리자 함성과 함께 모두가 달려 나갔다.


문제는 늘 초반이다.
“천천히 뛰자. 휩쓸리지 말자.”
다짐했지만, 옆에서 치고 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속도가 올라갔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순간

부상의 지름길이다. 마라톤에는 국대 출신도 있고, 첫 도전자도 있고,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아빠도 있다.

모두 다른 페이스로 뛴다. 누가 나를 앞질렀다고 해서 내가 패배자가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나의 호흡과 리듬.

10km를 지나자 비로소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심장 박동과 맞아떨어졌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땀을 식혀주었다. 그 순간 나는 자유였다. 지위도 직책도 의미 없었다.

두 다리로 뛰며 숨 쉬는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앞에서 누군가 신발끈이 풀린 걸 보고 소리쳤다.
“끈 풀렸어요!”
넘어질까 걱정됐다. 경쟁자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라톤은 싸움이 아니라 동행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20km를 넘어서자 고통이 시작됐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무릎은 뼈끼리 맞부딪히는 듯 욱신거렸다. 갈증에 입안은 바싹 말랐고, 구토까지 올라왔다.

'포기하지 말자. 포기만 하지 말아'
계속 되뇌었다. 마른 체구의 러너도, 나약해 보이는 러너도, 모두 참고 한 발 한 발 버티고 있었다.

나라고 못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 낳고 키우는 고통도 견뎠는데, 이 고통쯤이야.

유튜브에서 본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의 영상이 떠올랐다.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엄마, 자랑스러워!”라고 말해줄 순간을 상상하며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100m.
세상에서 가장 긴 거리였다. 피니시라인은 눈앞에 있는데 닿지 않았다. 다리를 질질 끌며, 끝내 양팔을 높이 치켜들고 들어갔다.

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무릎도, 갈증도, 피로도. 오히려 “조금 더 뛸 수 있겠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마라톤에 중독되는 거구나.


목에 메달을 걸고는 간식으로 나온 단팥빵을 게눈 감추듯 삼켰다. 세상에 그 빵보다 맛있는 게 또 있을까.

두 다리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말했다.
'앞으로도 이 다리로 계속 마라톤을 나오려면 살살 달래고 아껴 써야겠다.'

그리고 막걸리 한 잔. 땀으로 비운 자리에 들어오는 그 한 모금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주었다.
얘들아, 엄마 완주했다. 적어도 걷지는 않았다.


마라톤은 결국 인생과 닮아 있었다.
누구나 같은 출발선에 서지만, 모두 다른 속도로 달린다. 남과 비교하면 길을 잃고, 내 호흡에 집중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 때로는 쓰러질 만큼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결승선이 있다.

그리고 완주의 순간 알게 된다.
진짜 자유와 성취는 남을 이기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어제의 나를 넘어서는 데서 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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