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50분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다. 다행히 10시 알람에는 완전히 일어날 수 있었다. 자기 전 씹어 먹은 멜라토닌 250mg 덕분인지 푹 잔 느낌은 있다. 하지만 꿈의 영역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넘어오자마자 고개를 들이미는 것들이 있다. 탐탁지 않은 것들이다. 밀린 과제, 작성해야 할 자잘한 문서들, 그리고 며칠 뒤 감독자와의 정기 미팅.
사실 아침을 어지럽힐 만큼 압박을 주는 건 단연 감독자와의 만남이다. 다른 것들은 곁가지일 뿐이다. 아마 그것은 평가의 문제고, 내가 그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아무 변화가 생겨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세모에서 네모가 되든, 작았다 커지든 말이다. 정기 미팅은 명목상 내 항해가 순조로운지, 그렇지 않다면 해결 방안이 있는지, 나아가 더 순조롭게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검토받는 자리다. 내 항해가 순조롭다면 오히려 얼른 검토받고 싶어진다. 아마 그건 감독자에 대한 존경심 혹은 찬탄에서 비롯된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존경심은 필연적으로 중요성을 부여하고, 중요성은 때로 나에게 역효과를 준다. 항해가 매끄럽지 않다면, 그의 진짜 생각과는 무관하게 내가 어떻게 평가받을지 걱정하게 된다. 그에게 중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세상만사는 결국 조화와 균형이 으뜸이다. 중요성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면 균형이 무너지고, 기상조차 방해받는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방해받는 느낌은 유난히 기분 나쁘다. 의식을 되찾기보다 꿈속에 머물고 싶다는 뜻이니까. 만약 의식을 인간 본연의 상태로 본다면, 그것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물론 꿈과 의식 중 어느 쪽이 더 본연인지는 논쟁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아침이면 종종 내 내면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묻곤 한다. 내가 왜, 이른 아침부터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야 할까? 혹은 왜 느끼고 있는 걸까? 내가 너무 손을 놓고 있는 걸까? 고양이 털을 쓰다듬듯, 나 자신을 좀 더 살펴줘야 할까?
그러면 그는 말한다. "요즘 너를 잘 못 챙겼네. 그렇지, 너도 잘 알고 있네. 너를 잘 보살펴야 해. 사실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결국 너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중요성이 되려 너를 해친다면, 그건 모순이야. 그러니 줄여야 해."
나는 되묻는다. "그래, 맞아. 그런데 만약 중요성을 부여한 덕분에 얻는 이득이 그로 인해 받는 해보다 여전히 크다면? 그렇다면 중요성을 부여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는 말한다. "사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정말 중요한 건 없어. 우린 그냥 대양의 한 방울, 우주의 작은 점일 뿐이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조용히 생각의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이 부정적인 감정도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방치하든, 어떻게 하든, 사실 별 의미 없는 게 아닐까. 아니, 아닐까. 한 방울로서 자신을 돌보는 일, 그건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일지도. 긍정적인 기운을 품고 대양을 이루는 것. 아아, 모르겠다. 사실 내가 내면의 친구 말을 들을지 말지도 중요하지 않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생각의 꼬리를 잘라내고 문 밖으로 나선다. 차 시동을 걸고 익숙한 길을 따라 학교로 간다. 수업이 있는 건물 내 커피숍에 들르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며 커피를 마신다. 왜일까, 오늘 따라 그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나이, 성별, 피부색, 눈동자 색과 상관없이 그들도 모두 고통과 기쁨을 겪고, 중요성의 늪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모국어보다 덜 익숙한 언어로 커피를 주문하는 순간마저 친숙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