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인생
<내가 서있던 그 자리_그의 인생>
-生 에 눈을 뜨며
... 언제였던지 내가 몇 살 때였던지...
빛바랜 사진첩처럼 희미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는 첫 장은 허름한 집단촌 같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기억이 시작되는 첫 번째 장소엔 방 하나와 부엌 하나로 이루어진 세대들이 여러 세대가 마치 기차처럼 줄지어 있다.
아마 화장실도 요즘의 쪽방촌처럼 공동화장실이었던 것 같고 그 연립세대의 첫 번째 집 (다른 집보단 규모가 큼) 은 회장님 집이라 불리는 세대였고 그 집을 제외하곤 모두가 단칸방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의 생활은 어려서인지 별로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유난히 싸움이 잦은 한 세대가 생각난다.
아니 싸움이라기 보단 술주정하는 아저씨의 일방적인 고함소리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아저씨는 한쪽 팔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술만 취하면 온 동네가 시끄러울 정도로 고성을 질러면서 아주머니를 못살게 굴었다.
아주 어린 나이임에도 그 아주머니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도록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마 내 맘이 여리고 정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 생각해 본다.
거긴 한마디로 우리를 포함해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의 집합 체였던 것 같다.
추측컨대 그 당시 아버지는 어느 학교에서 잡일을 하셨던 것 같다.
아마도 학교에서 수위 또는 학교의 잡일을 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자전거로 월배에서 명덕네거리에 있는 학교까지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셨던 것 같은데 하루는 내가 졸랐는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앉아 가던 중 지금의 상인동쯤에서 소낙비를 만났다.
아버지는 비를 피해 자전거를 가게 추녀 밑에 세우고선 비가 멈추기를 기다 리는 동안 가게에서 사과를 사서 나에게 주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어린것을 감안해 딱딱한 사과껍질을 제거해서 주신다고 과도가 없는 현실에 아버지는 당신의 앞니를 이용해 껍질을 벗겨서 주셨고 그 사과 맛은 꿀맛이었다.
요즘 세대의 사람들이 이러한 광경을 목격했더라면 비위생적이라고 이맛살을 찌푸리게 될는지 몰라도 그 당시엔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았고 특히 우리는 경제적으로 힘든 형편인지라 더욱 맛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살던 옆집은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 타지방 사투리의 사람이 살았는데 그 집에도 내 또래의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세발자전거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 집은 세발자전거를 살 형편이 되지 못하였기에 그 애의 자전거가 무척 부러웠고 타보고 싶었다.
어쩌다 내가 타보고 싶어 자전거에 접근을 하면 그 여자아이는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라 나를 사정없이 할퀴고 꼬집어 얼굴에 상처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걸 지켜보던 우리 부모님의 마음은 어쨌을까 생각해 보니 가슴 저편에서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그 집을 떠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토록 갖고 싶었던 세발자전거가 생긴 날이기 때문이다.
그 세발자전거는 이사하는 전날까지 없었지만 이사를 와서 보니 자전거가 옆집아이 타던 자전거와 비슷하게 생긴 자전거가 할아버지댁에 와 있는 것이다.
그 자전거가 나에게로 온 과정은 생각하고 싶질 않았지만 후일 어머니에게 물어봤다.
“그 자전거 옆집 애 자전거 아니냐고"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고 내 나이기 이렇게 들어도 난 지금도 그 말을 믿고 있다.
할아버지댁은 넓은 마당이 있어 세발자전거 타기도 좋고 뛰어놀기엔 먼저 살던 집보단 훨씬 좋았다.
아버지는 위로 고모 두 분과 아래로 삼촌 세 분이 계신 육 남매의 맏아들이었다.
농사거리가 많아야 부자였고 먹고사는 형편이 나았던 시절에 어려운 가정에 맏아들로 농사만으로는 식구들의 생계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기에 산에 가서 땔감나무를 해서 지게에 담아 시장에 내다 팔았단 말을 전해 들었다.
큰 고모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작은 고모는 시장에서 옹기상을 했던 것 같고 작은 아버지는 마부였다.
장날마다 장꾼들의 짐을 오일장 따라 옮겨주는 일을 했으니 할아버지 집에는 저녁이면 항상 마차가 대문간에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농사거리도 제법 있었고 우리보단 넉넉한 편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댁 인근에 위치해 있는 작은집은 지붕부터 우리와는 다른 기와집이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초가였기에 벼 추수 후 그 볏단을 가지고 지붕을 새로 잇는 것도 본 것 같다.
아마 요즘은 그러한 광경은 민속촌 같은 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담장은 돌담이었고 담장을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쌓은 돌을 고정해 주는 일 종의 시멘트 역할을 하는 것이 흙이었기에 빗물에 그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돌담 위에도 볏짚으로 엮은 지붕을 길게 올려놓는데 이것도 선조들의 지혜라 생각된다.
할아버지댁은 안채와 바깥체로 구성되어 있었고 안채에는 방 두 개에 부엌 아래채로 이어지는 디딜방아가 있는 창고를 지나 단칸방이 아래채다.
아래채 옆 별동으로 화장실이 위치해 있었는데 밤에 화장실 가는 일은 어린 맘에 여간 무섭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화장실 가는 길이 무서워 참다 다시 잠이 들면 오줌싸개가 되는 일이 이따금 생기곤 했다.
땔감나무나 마른 볏단으로 밥을 짓고 난방도 했고 어둠이 찾아들면 호롱불을 밝혀 생활했으며 나중엔 문명의 혜택으로 비록 저녁시간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송전이 되어 전등불이 밝혀졌다.
등기구를 사거나 전기요금을 낼 형편이 못되었는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거하시는 안방과 우리가 살던 작은 방사이 벽체에 구멍을 내어 전등 하나로 방 두 곳에 조명을 하긴 했지만 호롱불에 비하면 대낮같이 밝은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난방도 연탄이란 것이 보급되어 땔감은 점차 그 역할이 사라졌다.
하루는 연탄난방을 하는 아래채에서 자고 나서 연탄가스(일산화탄소)에 중독이 되어 몸도 가누질 못하니 당시의 민간요법이란 동치미 국물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어느 하루는 어머니가 집안에 둔 돈이 없어졌다고 한다.
식구 모두에게 물어도 돈의 행방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론 그때 내 나이가 서너 살 정도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어머니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리지만 나도 가족구성원이니 지나가는 말로 돈을 가져갔냐고 물었는데 난 거침없이 가져갔다고 대답했던 일이 있었다.
실은 난 그 돈의 존재도 몰랐고 돈이 가져갔더라도 쓸 줄을 모르는 나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을 둔 사람은 있지만 누군가는 가져갔기에 없어진 것인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내가 풀었던 것 같다.
그때당시 나는 뒤에 발생하는 후폭풍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사용처를 대라고 다그쳤고 그 혼줄을 감당치 못해 나는 시장 가는 길에 위치한 가게에서 눈깔사탕 사 먹었다는 말을 했다.
그 집을 가보자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가게로 갔지만 당초 돈의 존재부터 모르는 내가 그 집에서 눈깔사탕을 사 먹었을 리 없었고 주인 또한 나에게 판매한 적이 없었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머니는 그 돈이 얼마인데 어린 꼬마에게 그까짓 눈깔사탕 값으로 다 받고서 거슬러주지도 않았냐면서 나쁜 사람이라고 한바탕 싸우고 돌아왔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그날 없어진 돈은 내 소행이 아니었다고 진실을 말해줘 야지 하는 맘을 먹고 있었지만 이제 연로해서 어쩌면 그날 일을 까마득히 잊고 사시는 어머니에게 나쁜 기억을 더듬어 드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혼자서 머쓱한 웃음을 한번 지어본다.
그 어린 꼬마가 책임지고 도난사건을 종식시킬 일이 아니었음에도 왜 내가 그런 대답을 했을까 하는 물음표를 달아본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떤 일이던지 책임감을 가지고 덤벼 본 것을 연관 지어 보면 아마도 엉뚱했지만 그 기질은 돈키호테와 같은 나의 본성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난 혼자서 짧은 다리에서 나오는 종종걸음으로 시장을 찾아간다.
장을 가는 이유는 월배에 사는 순옥이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버지의 친구가 장사를 하러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라이터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라이터 돌장사를 하시는 분인데 내 가 가서 인사를 하면 “임군 (아버지를 칭함) 아들 왔구나" 하면서 맛난 걸 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달력은 볼 줄 모르는 나이지만 장날이면 골목길이 분주해지니 장날이란 걸 직감하고 장으로 향했다.
어쩌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장에 안 오시는 날은 난 세상의 반을 잃어버린 냥 허전한 맘으로 돌아오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