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심이 Sep 11. 2024

아빠의 이야기 2

아빠의 인생 


둘째와 셋째삼촌은 공군과 육군의 현병인 직업군인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삼촌들도 우리보단 사는 형편이 나았지만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워도 맏아들이라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동네에는 같이 코를 흘리며 어울려 노는 친구들이 많았다. 

같은 나이도 같은 성별도 아니지만 누나나 형벌되는 아이들과 어울려 이집  저집 마당과 골목을 누비며 놀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동네에 이따금씩 오는 걸인 (모두 그를 "모또" 라 칭함)이 나타나 어울려 놀던 애들이 그를 피해 모두 도망을 갔다. 

하필이면 애들이 할아버지집 안으로 도망가서 대문을 잠궈 버렸고 동작이  민첩하지 못했던 난 혼자 대문 밖에서 그 걸인의 손에 잡혀버렸다. 

그 사람은 내가 귀엽다고 번쩍 들어 올려 자기 입에다 입맞춤을 하고선 가 버렸다. 

이것을 대문틈새로 보던 아이들은 한동안 나를 모또랑 뽀뽀했다고 놀려대곤  했었다.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나이였던 것 같은데 어느 여름 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은 탄생을 알리는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부고를 하는 집에선 울음소리를 듣는다 했다. 


모두가 운다는 것을 보면 사람을 비롯해 이 세상의 모든 생물체가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임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 후 할머니와 어머니의 고부간의 갈등이 생겼던 것 같다. 

할머니의 얼굴은 이가 빠져 볼이 움푹 패여 마치 마귀할멈과 같은 모습이었 고 불심은 가득했으니 모두 할머니를 합죽보살이라 칭했다. 

그 칭호는 할머니의 외관에서 비롯되어 붙여진 것 외에도 할머니의 성미 또한 보통은 아닌지라 그러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동네사람들의 평이야 어찌하던 간에 할머니는 동네에 잔치가 있으면 귀여운 손자라고 내 손을 잡고선 잔치음식을 배불리 먹게 해주셨고 남은 음식은 싸 가지고 오시던 일도 기억난다. 


그땐 지금은 먹지 않고 있는 돼지고기 수육도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수육의 껍질은 털이 있어 먹기에 부담스러웠고 그 아래의 비계부분은 고소 한 맛, 비계 아래의 살코기는 퍽퍽하게 느꼈던 식감을 아직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당시 시골에서는 명절이 되면 돼지를 잡아 나눠가지곤 했었는데 돼지를 도축하는 장면이 여간 잔인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그걸 목격하고 얻은 충격이 어린 맘에 상처로 크게 다가와 자리함으로 서 지금 돼지고기를 먹지 않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아마도 소를 잡는 광경을 목격했더라면 지금 소고기도 먹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어릴 적 나에게 큰 즐거움을 주던 놀이는 여름엔 앞개울에서 물놀이하는 것 과 겨울에는 연날리기와 딱지치기 그리고 썰매를 타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화장실에 쓰이는 종이도 부족했던 때라 딱지를 만들 수 있는 종이를 학교에 다니고 있는 누나와 형의 책표지를 몰래 찢어 만들곤 했다.  

앞개울은 수심이 얕았던 기억이 나며 만약 그 개울의 수심이 깊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잠수 전문이 아니라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수영과 자전거는 한번 배워두면 평생을 간다던데).


연을 만들려면 대나무와 창호지가 필요한데 우리집엔 대나무가 귀해 싸릿대를 가늘게 쪼는 걸로 대신하고 창호지는 방출입문 도배용으로 둔 것을 몰래 잘라 만들거나 이나마 없으면 지나간 달의 달력을 가지고 만든다. 연의 뼈대와 종이와의 접착제로는 풀이 귀하니 밥을 사용하는데 쌀밥은 접 착력이 뛰어나지만 보리밥은 잘 붙지 않기에 보리밥을 먹고 사는 것은 철없는 동심에겐 불만이었다. 


썰매의 날은 칼날같이 생긴 것이 필요했는데 당시 양철통의 굽이 스케이트 날로 쓰였지만 다른 집과는 달리 우리집에선 구하기가 힘들어 철사를 가지고 만들어 탔던 것 같다. 

썰매의 날을 철사로 만들면 직진성이 떨어져 옆으로 잘 미끄러지니 좋아할 리는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찰밥을 얻어먹는 풍습이 있는지라 내가 들어가면 “합죽보살 손자 왔네.” 하면서 찰밥을 주곤 했다.


동네 젊은 사람들은 조금 산다는 집에다 조리를 던져 넣고선 나중 복조리라고 돈을 받곤 했었는데 할아버지댁엔 복조리마저도 던지질 않았으니 짐작할 만하다. 


설이나 추석이 다가오면 신발이나 새 옷을 사주니 그 옷은 명절당일 전에는 입을 수가 없으니 명절이 얼마나 기다려지는가는 당시 우리 모두가 경험했 던 일이다. 





그러다 난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넉넉지 못한 형편임에도 아버지는 나에게 등에 짊어지는 가방을 사주셨다. 

그 시절엔 우리나라가 후진국인 시대라 서방에서 지원받은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을 학생들에게 주던 시절인데 선생님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손바 닥에 매를, 잘 외우면 옥수수빵을 주었다.


나중엔 옥수수빵이 우유와 밀가루로 만든 식빵으로 바뀌어 급식이 된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이 부족하긴 해도 우리집에는 벼농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수철이 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논에 나가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온종일  일을 하고서 어둠과 함께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끼니를 장만했는데, 지금도 잊지 못할 어머니의 맛 중 하나는 논고동을 잡아 와서는 끓여주는 논고동국과 아주 가끔이지만 두부를 사와서 끓여주는 두부국 맛이다.  


아직도 그 때 찌개 속 두부의 고소하게 느껴졌던 향은 내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춘천에 출장을 갔는데 현지 직원들과 동행해 점심 식사를 하러 간 식당에서 맛 본 두부전골의 맛이 세월이 흘렀음에도 예전 어릴 적 맛과 흡사하여 나중에 다시 찾아보고 싶었지만 위치와 상호를 몰라 이젠 추억으로 남아버린 그 맛을 가끔씩 생각해본다.

(아마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고 온라인으로 정보가 공유되던 시절이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으련 만)


다른 집의 추수하는 광경은 전기동력의 탈곡기를 사용하니 쉽게 볏단이 털 려 나오는데 우리집 탈곡기는 둘이 서서 발로 밟는, 오로지 인력에 의지해 서 탈곡하는 기계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집 형편을 짐작할만하다. 


어쨌거나 난 탈곡하는 날이면 탈곡기를 밟아서 돌리고 있는 사람들의 힘이 더 들던 간에 오르내리는 발판의 가운데에 끼어 마치 놀이기구라도 타는 냥 신바람 나게 즐기곤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집안 갈등 탓인지 사춘기에 접어든, 모두가 모범생으로 칭했던 형은 비뚤게만 나가서 부모님 속을 태우다 나중 입대하기엔 어린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도피처로 해군 하사관으로 자원해서 떠났다. 


나는 군대 갔던 형이 휴가로 가끔씩 왔다가는 날이면 철없이 형을 따라 나섰다. 

그 이유는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형을 따라 신작로까지 따라가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어린 동생을 돌려보내기 위해 설탕을 뿌린 찐빵을 몇 개 사서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다. 


철부지인 나는 형을 배웅해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찐빵을 먹고 싶어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물론 형과 나이차이가 11살이나 되었으니 아마 난 초등학생도 되기 전이라 생각된다. 

내가 몇 살 때인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이 또한 초등학생이 되기 전임엔 분명하다).



하루는 어머니의 손이 이끌려 버스를 탔다.

버스로 이동해 도착한 곳은 큰 저수지였고 어머니와 나는 저수지 둑으로 올랐다. 


어머니보다 앞장서서 저수지 둑으로 올라가는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어머니는 저수지 둑 위에 앉아서 무얼 생각하시는지 한참을 앉았다가 내려 가자고 한다. 


우린 내려와서 저수지주위로 늘어선 매운탕가게로 가서 매운탕을 시켜 먹었다. 

당시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위장 질환으로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걸로 기억하는데 (죽과 밥을 삶아서 드시고 짙 은 청색 병에 든 하얀색의 위장약을 드시고 있었던 걸로 기억) 왜 매운탕집 으로 점심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인근에 다른 메뉴의 식사준비가 되는 식당이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내 기억으론 전골냄비용기에 담아져 끓인 매운탕은 얼마먹지도 않은 채 남 겨 두고 나왔던 것 같다. 


후일 어머니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와의 갈등, 남아선호와 맏아들에 대한 기대를 걸던 시절에서 맏아들의 방황, 그리고 가난 등 많은 걱정과 고뇌로 인해 어머니생의 마침표를 찍는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갔다 한다.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은 내가 어머니에게 돌에 걸려 넘어진다고 하면서 (나는 죽어러 왔는데 저 작은 애가 제엄마 돌부리에 걸려 자빠지면 다친다고 걱정을 해주는데) 어머니를 걱정해 준 것이 어머니 맘을 돌리는데 근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왜 나를 데리고 갔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 그 저수지는 송해공원이 있는 옥연지이며 당시에는 기세못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니 아버지는 할아버지집을 떠나 분가를 결심했던 것 같다. 


당장 분가를 하려면 이사 갈 집이 있어야 하는데 우린 아무런 준비도 경제적 능력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나름 섬유공장을 하면서 넉넉하게 사는 외삼촌의 배려로 어느 과수원의 폐가로 이사를 했는데, 계절이 추운 겨울이었고 그 폐가는 관리가 되지 않은 상태라 얼마나 허술했던지 찬바람은 거침없이 들어오고 자고나면 방안에 있던 걸레나 물은 꽁꽁 얼어 있는 것이다. 


그 폐가의 작은 방엔 노총각 한사람이 기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방은 우리가 들어간 방보단 사람이 살고 있어 관리가 나름 되어 온 방이지만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폐가의 장판지가 특이했던 것 같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장판지는 종이장판지에 니스 칠을 한 것이 보편 적이었으나 마치 두꺼운 나무합판 같은 것을 깔아 놓았던 것 같았다(이음새는 테이핑처리를 한 것 같았고). 


그러니 난방을 해도 두떠운 장판지가 오히려 단열재 역할을 해 온기가 위로 올라올 수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걸 만년장판이라 부르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 만년동안이나 닳지 않고 오랫동안 쓸 수 있다고 명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 폐가에서의 하루는 일어나 보니 온통 바깥세상이 흰색으로 변해있었다. 


난 그저 즐거운 맘을 주체하지 못해 식구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아무런 생각 없이 조그마한 야전삽 하나를 들고선 수북이 쌓인 눈을 치워가면서 제법 거리가 먼 외갓집가지 갔다. 


외갓집은 공장안에 집에 있어 대문이 개방되어 이른 시간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외갓집 식구도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 어린 녀석이 고무신 신은 발로 작은 군용 삽자루 하나들고 눈길에 꽁꽁 얼어 왔으니 모두 놀랐던 일이 있었다(물론 우리가족은 애가 없어졌다고 소동이 벌어졌고). 



우리가 기거하던 과수원 속 폐가와 다니던 학교는 아직 전학을 못해서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제법 먼 거리였다. 

하지만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등교했고 그 이유는 차비로 받은 돈으로 군것질을 하기 위해서다. 

학교를 오가는 길도 눈이 와서 미끄러웠으나 걷고 나면 돈이 생기고 그 돈은 맛난 과자나 사탕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때 처음으로 라면이 나온 시절이었다. 


감미료에 익숙하지 않던 시대에 감미료가 듬뿍 들어간 스프국물과 기름에 튀긴 유탕면의 맛이란 어떤 음식을 여기에다 견주어도 비할 바가 되질 못하리다. 


하지만 그 맛난 라면도 가격이 부담되니 라면의 양을 불리기 위해 소면국수 를 같이 넣어서 먹었던 것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다.



이전 02화 아빠의 이야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