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심이 Sep 11. 2024

아빠의 이야기 3

아빠의 인생 



겨울방학이 지나고서 2월이 되어서 난 월배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전학을 간 학급엔 이종 사촌이 부회장을 하고 있었다. 


3학년이 되면서 우린 그 폐가를 나와 새로운 보금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지금 어머니가 사시는 본가를 신축해서 이사하기 전 까지는 모두 외삼촌의 배려로 거주지를 잡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철물점을 하셨고 아버지는 외삼촌 공장에 일을 나가셨으니 그 후론 나름 형편이 좀 나아진 것 같다. 


그때 나는 만화에 빠져서 만화방 단골이었던 기억도 난다.






하루는 집 근처에 사는 친구 둘과 초등학생 행동반경에는 제법 먼 강나루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지금도 자동차로 이동을 해도 한참을 가야 하는 거리인데 걸어서 갔다는 것이다.


첨 가본 곳이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나루터에 배가 묶여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선 저 배를 한번 타보자면서 밧줄을 풀어서 셋의 힘을 모아 힘껏 강 쪽으로 밀어보니, 배는 강의 물살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다. 


다음 발생한 문제는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배는 우리 셋이서는 멈출 수도 없었고 방향 제어도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를 잡아 보려는 우리는 수심이 점점 더 깊어짐을 느꼈기에 얼른 그 배를 포기하고 흠뻑 젖어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 배는 악동(?) 셋의 불안감이 가득 스며들어있는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배 주인을 만나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라 우린 겁을 먹은 상태에서 젖은 옷은 차가운 줄도 모르고 걸어서 왔던 길을 빨리 도망가겠다는 생각에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그 배는 낙동강을 따라 부산까지 갔을까? 


더 멀리 바다로 가버렸을까? 


아니면 주인이 찾아다 놓았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 해보았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그곳이 지금의 사문진나루터다. 






어머니의 철물점 가게가 자리 잡힌 지 몇 년 후 외삼촌의 사업은 번창하여 공장을 더 키우기 위해 이전을 하게 되었고, 우리도 철물점을 접고 그 공장 부지 내에 거처를 마련하여 이사를 했으며, 가게까지 하나 열었다. 


그 가게의 주 고객은 외삼촌 공장의 직원들이었다.  


공장에는 일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시골에서 온 직공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기숙사도 무료 운영되고 있었으니 그 직공들은 우리 가게의 고객이 되어 가게 운영에 보탬이 된 것이 사실이다. 


아버지는 그 공장에 공장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장의 경영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장을 새로 지을 때 공장부지에 외삼촌 집도 새로 지어 이사를 했고 당시 면 내에서는 가장 좋은 저택이라 소문이 나서 도둑들의 표적이 되어 심심치 않게 도둑들의 원치 않는 방문을 받아 외삼촌은 침입방지를 위한 첨단 시설까지 했었다. 


그 당시 침입방지를 위한 첨단시설이란 창문을 무단 개방했을 때 센서가 작동해서 알람이 울리는 것인데도 그때는 모두가 신기하게 여겼다. 


당시 서민들의 난방연료는 연탄이었지만 외삼촌댁은 기름으로 난방을 했어며 집안에는 목욕탕도 있었으며 항시 수도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이 나왔다. 


밖에는 정원이 있었고 정원에는 연못과 그 안에서 유영하는 금붕어를 볼 수 있었다. 


공장 옆엔 외삼촌 소유의 사과나무 과수원이 있어 사과도 따먹고 사과나무 그늘 아래서 외사촌과 이종 사촌 동생들과 어울려 놀았던 기억이 난다. 



지독했던 가난의 기억이 퇴색되어 갈 즈음, 초등학교에서 유니폼이 탐이나 보이스카웃에 입단해 봤다. 

하지만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는 활동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하루는 보이스카웃 활동을 위해 버스로 이동하다 앞 좌석에 앉은 사람의 머리에 구토 세례를 한 적도 있다. 


그 일이 알려져 수학여행이나 차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일이 있으면 선생님이 항상 날 챙기던 것과 겨울철에도 버스에서 창문을 열어두니 주위 승객들에게 눈총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 멀미는 중학교 진학해서 매일 차를 타고 다녀보니 차츰 덜해진 것 같다. 

지금도 몸 상태가 좋지 못한 날엔 멀미를 하고 있고 딸애도 멀미를 잘하는 것을 보면 아마 그건 나를 닮아서 일거라 아닌가 생각해 본다. 


초등학교 고학년시절엔 가난에서 한 걸음 비켜났음에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축구와 핸드볼선수로 대회에 나가곤 했다.  


내 위치는 운동 신경 유무에 상관없이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로 축구나 핸드볼 팀 모두 골키퍼를 했으나 둔한 것인지 마음이 넓은 것인지는 몰라로 골문 안으로 들어오는 공은 항상 너그럽게 통과를 시켜 주었으니 우리 학교가 좋은 성적을 낼 리가 만무했다. 


당시 행정구역이 월배는 경상북도 달성군에 소속된 지라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을 할 수 도 있고 화원에 소재하고 있는 중학교를 갈 수도 있었는데 난 시내를 택했고, 마침 진학한 중학교는 야구부가 있는 학교라서 야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야구 글러브와 야구 배트를 장만하는 것은 당시의 나로선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가니 사는 것은 엄두도 내질 못하여 야구 글러브는 두꺼운 종이로 만들었고 야구배트는 과수원에 있는 고사된 감나무를 잘라 보름 이상 열심히 칼로 깎는 공을 들여 만들었다. 


물론 종이글러브는 공을 받으면 손바닥이 아팠고 그나마 몇 번을 받으면 찢어졌고 보름이상 공을 들여 만든 배트는 야구공을 두어 번 맞췄을 뿐인데 금방 부러져 버렸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감나무는 재질이 약해서 배트용으론 부적합했던 것이다. 


반면 재질이 약했으니 만들기도 용이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용돈을 조금씩 모아 야구글러브랑 배트도 장만하고 축구를 하면서 놀던 동네 아이들에게 야구도 알리고 게임도 즐겨보고 가끔씩 윗동네 아이들이랑 추수가 끝난 겨울 논에서 시합도 했던 것 같다. 


야구 베이스란 것은 돌을 가져다 놓았지만 당시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야구를 해 본다는 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놀이임은 틀림없었다. 


그때 좋아했던 야구는 이 나이에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고 경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등학교도 야구가 주특기인 학교를 가는 바람에 방과 후엔 반 대항 내기 시합도 하곤 했다.






이전 03화 아빠의 이야기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