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떠난 집에서

트라우마를 덮어쓰는 방법

by 텔테일telltale

다음날 아침, 나는 학원에 늦을 뻔했다. 허둥지둥 시작한 바깥 일과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점쟁이가 아닌 이상 누군가 다가와 '너 엄마가 암에 걸렸다면서?'라는 대화를 시작하진 않을 테니까. 그래서 학원에서 돌아올 때쯤에는 잊고 있었다. 엄마가 아파서 외할머니 댁에 가 있다는 걸. 그리고 현관문을 연 채로 우뚝 멈춰 섰다. 집안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가장 처음 느꼈던 점은 집안의 온도가 달랐다는 것이었다. 서늘했다. 온도가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용 조끼를 입고 팔짱을 낀 채로 손부터 씻으라던 엄마를 잠시 상상했다. 집에 항상 있었던 엄마의 부재가 부족한 온도로 와닿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냉장고부터 열었다. 점심을 삼각김밥 하나로 때운 채였다. 락앤락 더미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닐봉지들까지 열어보았지만 먹을 만한 것은 없었다. 실망스러움에 입술을 삐죽이고 돌아섰다.


쿵. 신경 쓰지 않은 덕에 냉장고 문이 큰 소리가 나며 닫혔다. 큰일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개 같은 년. 냉장고 다 부숴먹을 거야? 너 혼자 써? 너는 생각이 없고 몸만 움직이지? 닫힐 때까지 손잡이 잡고 있는 게 그렇게 어려워? 손이 썩어 문드러졌어?"


원래라면 엄마의 그런 욕설이 날아오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엄마의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물건이 날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은 고요했다. 적막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혼날까 무서워 두근댔던 심장박동이 잦아들었다. 나는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후..."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엄마는 늘 어딘가 짜증이 나 있었다. 집안에서는 항상 엄마의 기분의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치를 살펴야 했다. 실수로라도 엄마의 기분을 건드리는 순간, 욕을 먹거나 두들겨 맞았다. 나는 소리 지르고 울거나 방문을 쾅 닫는 것으로 대항했지만, 그런 방법은 으레 더 많은 매질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집에 없었다!


숨통이 트인다는 느낌은 콜라캔을 처음 딸 때의 청량감과 같았다. 자유는 일상 곳곳에 존재했다. 샤워하고 나서, 제대로 씻었는지 구석구석 검사를 맡지 않아도 되었다. 발을 닦다 발수건 모서리를 뒤집었다고 머리를 쥐어박히지 않아도 되었다. 발소리 나게 발뒤꿈치로 걸었다고 욕먹을 일도 없었다.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 먹을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밤은 추웠다. 적막은 더 이상 따스하지 않았다. 불안했다. 밤이 되자 잠긴 안방문 안에서 무언가 검은 형체가 문을 열고 나타날 것만 같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나는 집안 곳곳의 불을 다 켰다. 그래도 무서웠다. 내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몇 번이고 읽었던 소설, 레미제라블을 펼쳤다.


책에 몰두하면 안정감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서 재현되는 세계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인물들은 항상 소명을 받거나, 목표를 세우거나, 구원자를 만났다. 죽는 사람들조차 뜻을 위해 죽었다. 모든 행위에는 이유가 있었고, 해결책이 있었다.


나와 엄마에 대해 생각했다. 엄마는 이유를 알 수 없게 행동했다. 하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였다. 내가 싫어서라면 왜 싫은지의 이유가 있을 거였다. 내가 엄마를 암에 걸리게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가 있을 거였다.


내가 그 이유를 찾아내서,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밤을 보냈다.


아침에는 학원에 갔다가 낮에는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나는 매끼 라면을 끓여 먹었다. 영양을 챙긴다는 것의 개념을 몰랐고,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타지에서 일하던 아빠는 2주 한 번씩 외할머니댁으로 엄마와 동생을 보러 갔다. 아빠에게서는 가끔 용돈이 부족하지 않은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고?"


"응."


"안 춥고?"


"응."


"넌 다 컸으니까, 잘 알아서 해라."


"응."


"엄마가 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거라, 스트레스 안 받게 해야 한다. 집 어지르면 안 돼."


"응."


난 아빠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것이 염려인지, 애정인지, 아니면 원망인지를 가늠하려 애썼다. 자신의 아내가 병에 걸리도록 만든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아비 된 도리라도 해도 이런 전화는 하기 싫을 터였다. 그렇다면 의무감일까? 아빠는 내가 싫은데도 억지로 책임감 때문에 내게 안부전화를 하는 걸까? 나는 아빠랑 통화할 때면 목이 메었다.


아빠와의 통화가 끝나고 나면 진이 빠졌다. 몇 마디 안 하고도, 온몸의 감정을 다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바로 책 속으로 도피하곤 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항상 노력으로 미움을 극복하고, 역경을 이겨내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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