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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Jul 27. 2024

어머니의 부업과 소일거리

부업은 뜨개질, 소일거리는 삼 삼기

가 어린 시절, 동네 아주머니들의 부업으로 손뜨개질이 한창이었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부업거리였고, 아주머니들이 어떨 땐 한집에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하며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것이어서 그 시절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뜨개질감을 하나 가득 받아오셨다. 뜨개질 부업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돈이 얼마나 들어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자투리 실을 받아올 수도 있고, 뜨개질 본에 익숙해지니 실만 있으면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 입힐 수 있어서 어머니들은 무엇보다 그 일을 열심히 하셨다. 그래서였을까. 어린 시절 어머니는 손으로 뜬 옷을 입혀주신 적이 많았다. 지금은 그런 손뜨개 옷이 얼마나 정성 들여 지은 것인지 알기에 비싼 가격에 함부로 사기도 어렵긴 하겠지만, 나는 그때 그 옷이 싫었다. 자투리 실을 사용하기 때문에 같은 색 실이 당연히 모자라서 옷은 당연히 가로줄무늬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팔꿈치와 무릎은 동그랗게 다른 색이기도 했다. 티셔츠에 바지, 조끼에 망토까지 뜨개질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적이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야 그 옷을 입는 것이 당연했지만, 커가면서 자투리 실로 뜬 그 옷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손위 형제들이 입었던 옷의 실을 풀어서 다시 뜨개질하여 내 옷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당연한 재활용이었는데도, 그때는 새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탓도 있다. 어머니가 뜨개질로 만들어주신 옷은 정해진 모양대로 만든 것이라 새롭거나 예쁘지는 않았다. 가끔씩 동그란 방울장식, 술 장식을 달아주시긴 했지만, 그 시절, 나는 그 옷이 싫었다. 뜨개질로 만든 바지는 집에서만 입었다. 밖에 입고 나갈 옷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동네 친구들 중 그런 뜨개질 옷을 입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거의 비슷한 디자인의, 색깔만 다른 뜨개질 옷을 입고 돌아다녔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가난했던 시절, 옷값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하루하루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들 옷을 매번 사 입힐 수는 없었고, 동네 사람들끼리 아이들 옷은 물려 입히기도 했었던 때이니, 부업으로 돈도 벌면서 아이들 옷도 만들어 입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었겠는가. 그런 어머니의 뜨개질을 손위 형제들은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그들 중 하나는 매년 모자나 조끼는 코바늘이나 대바늘을 이용하여 쉽게 뜨기도 한다. 지금도 우리 집 거실의 벤치를 덮어 둔 것은 그녀가 코바늘로 뜬 모티브 덮개이다.


그리고 가끔씩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마른 고추의 꼭지를 따는 일이 주어질 때가 있었다. 동네 뒤쪽에는 옛날 창고가 있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 창고는 헐려 없어졌다. 그 창고가 없어진 빈 공간-그땐 단순하게 '창고 뜯었는 데'라고 불렀다-에 엄청난 양의 마른 고추가 내려졌다. 아주머니들은 각자 빈 공간에 자리 잡고 장갑을 낀 채 하루 종일 마른 고추의 꼭지를 땄다.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날, 하루 종일 마른 고추의 꼭지를 딴 값은 근당 얼마 정도로 잡혀있는데, 그리 많은 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돈이라도 있어야 무엇인가를 더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우리 어머니를 비롯한 아주머니들은 열심히 그런 부업에 참여했었다. 어렸던 나도 어머니 옆에 앉아 고추 꼭지 따는 일을 거들곤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그런 부업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인건비가 더 싼 곳이 있었거나 기계가 도입되었던 모양이다.


뜨개질이나 고추 꼭지 따는 것은 돈을 벌며 일하는 것이었다면, 어머니는 돈을 들여하는 일도 하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은 분명히 어머니의 돈을 들여서 하는 일이지만 결과물로 보자면 돈을 버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베를 만들기 위한 삼 삼기였다. 삼을 삼기 위해서는 안동포 삼베 마을에 가서 푹 삶아 말린 대마 줄기를 사 와서 하루 이상 물에 담가 불린 다음 껍질을 줄기에서 벗겨 내고, 무딘 끌-나중에 찾아보니 삼톱이라고 한다-로 주어 문질러 불순물을 긁어낸 뒤에 대마 껍질을 묶어서 올을 찢었는지 올을 찢어내어 묶었는지는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그 삼 껍질을 손톱으로 가늘고 길게 찢고 빗으로 빗어 실 모양을 만들었다. 이제 그다음부터 다시 본격적인 노동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가느다랗게 찢은 올의 양끝을 느슨하게 묶고 그것을 긴 막대기에 다시 묵어두셨다. 또 다른 막대기를 커다란 병에 꽂아 넣고 실을 묶은 막대기를 걸쳐서 실을 자아낼 준비를 하고서는 그 실을 한올씩 뽑아 침을 묻히고 거친 껍질을 입으로 훑어내어 뱉어가며 드러낸 한쪽 허벅지며 무릎에 그 실을 문질러 꼬아서 삼베실을 잣기 시작하셨다. 나는 이 삼베실 잣는 과정이 싫었다. 어머니가 입으로 훑어낸 껍질을 탁탁 뱉어내는 것이 싫었고, 어머니의 침 냄새가 가득한 빳빳한 실도 싫었다. 침에 섞인 대마껍질을 뱉어내야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이 일을 마루나 마당 근처에서 하셨다. 그렇게 자아낸 실은 작은 막대에 감아서 실꾸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실꾸리를 가지고 어머니는 외갓집으로 가셨다. 딱 한번, 외갓집에서 그 실꾸리로 길쌈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요즘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는 그 장면, 즉 마당에서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실꾸리를 풀어 매고 길쌈을 준비하는 과정을 외갓집 마당에서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삼 삼기 이외에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한 장면은 큰 외숙모님의 베 짜는 광경이었다. 딸가닥 딸가닥 소리가 신기하기도 하여 외숙모님이 길쌈하시는 방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일단 방에서 퍼져 나오는 엄청나게 안 좋은 냄새 탓이다. 그게 아마 된장풀 냄새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나는 냄새에 민감한 모양이다. 베 짜는 모습이 려진 그림을  보면 그때 그 냄새가 함께 떠오른다. 그런 나를 보고 외숙모님이 문을 닫으라 말씀하셨기에 얼른 문을 닫았다. 그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나면 황금빛 삼베가 탄생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젊었을 때 삼았던 실로 만든 전통 삼베 무척 고운 것이었다. 현재 최고급품이라는 9 새보다 더 곱게 짠 것이라 하셨다. 그렇게 당신께서 시집올 때 혼수로 만들어오신 그 고운 옷감은 오래전에 아버지의 수의로 만들어 놓으셨고, 그 옷은 2년 전 아버지의 마지막 옷으로 곱게 입혀져 아버지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서 삼은 실로 만드신 삼베는 9 새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7 새 이상 정도 되는 것으로, 당신의 자식들이 결혼할 때 혼수로 한필씩 주려고 만드신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 자식들 중 결혼하지 않은 세 사람이 불혹을 넘어서게 되자 어머니께서는 보관하고 계시던 삼베 한필씩 내주셨다. 수의는 만들지 않더라도 나중에 팔면 꽤 돈이 될 것이라 하시면서. 그 베 한필이 지금 우리 집 벽장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다. 내가 저것으로 수의를 만들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의 고된 작업이 그대로 녹아있는 것이라 함부로 처분하기도 힘들 것 같다. 펼쳐서 한번 널었으면 좋겠지만 저것을 다시 감는 일도 엄청난 일인지라. 매번 제습제를 바꿔주고는 있지만, 옷감이 괜찮은지 걱정되기도 한 저 한필의 삼베는 과연 내가 언제 쓸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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