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이성친구였으나
MBTI는 모르겠고, 나와 똑같이 물고기자리 O형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서로가 같은 초등학교-일제의 잔재였던 당시 명칭은 국민학교였다-를 졸업한 동창이라는 것 이외에, 음악을 좋아하고 사진 찍는 취미가 비슷했다는 것 밖에는. 아, 하나 더 있다. 요즘 사람들은 MBTI로 얘기하겠지만, 우리 세대는 별자리와 혈액형으로 서로의 성향을 가늠했다. 믿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와 나는 똑같이 물고기자리 O형이라, 통계적으로 본 수치에 따르자면 비슷한 성향이었다. 우리는 서로 사는 지역이 다르기에 아주 가끔씩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카카오톡은 우리를 오래도록 연결시켜 주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남녀공학이 없었기에, 이성의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초등 6년의 기억은 중등 6년의 기억 속에 다 묻혔고, 다시 대학과 취직으로 옛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가던 2000년대 초반, 동창 찾기 소셜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이를 통해 갑자기 동창 모임들이 생겨났고, 그때를 그리워하던 몇몇 친구들의 주도로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모임에 참여했다. 솔직이 말하자면, 나는 그 모임에 나온 친구들과 그리 친하지도 잘 알지도 못했다. 오래 전이기도 했고, 당시의 친구 관계는 보통 동네별로 형성되는 탓에 학교는 같아도 서로가 낯선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꼬꼬마 시절부터 십 대 초반까지의 6년을 보냈어도, 한 학년에 500명 가까운 동급생이 있다면 서로를 기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동창들이 거의 잊어버린 일들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한 동창의 등장으로 모임은 횟수를 거듭하고 지역을 달리하여 개최되었다. 그 동창은 아마 6학년 때 전학을 갔거나 중학교 입학 후 전학을 갔었던 모양이다. 그와 같은 반이 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던지 그는 나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그는 이상하게도 초등학교 때의 일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모임에 참여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편으로 그가 전학을 가게 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게 되면서 아마도 힘든 시간을 보냈었구나, 그래서 자신이 행복하게 지냈던 초등학교 시절의 그 소소한 일까지 기억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나는 학교 다닐 때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동창들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같은 반이었던 친구도 있고, 6년 동안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던 친구들도 있었다. 대다수가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는 친구들이었다. 여자 동창들이야 같은 여중과 여고를 다닌 경우도 많아서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남자 동창들은 완전히 새로운 아이들이었다. 내가 그렇다고 해서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큼 그들도 나에 대해 기억하는 바는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래도 몇 번의 모임은 그 기억력 좋은 남자 동창-어느 순간부터 그는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았지만-과 여자 동창들로 인해 참석하게 되었고, 이후 모임의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되거나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는 먼 지역이라 해도 시간을 내서 만나기도 했었다. 내 경우에는 서울에 가끔씩 올라가서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여자 동창들이 그 당시에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러 가면서 동창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런 작은 모임들에서 어쩌다 보니 친해지게 된 남자 동창들이 있었다. 이미 그들에 대해서는 노래로 기억하는 이들에서 언급했었던 적이 있는데, 이 친구는 그 두 동창 중 하나이다.
이 친구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것을, 서로가 몇 반이었지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아마 같은 반이었어도 서로에겐 거의 기억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 1년을 함께 같은 교실에서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공감대 형성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울의 동창 모임에서 꼭 함께 만난 적이 있었고, 명절이 되어 고향에 가게 되면 이 친구와는 만나기도 했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만나 고향 소도시의 외곽 어느 곳에 차를 세우고 별을 함께 보기도 했었고, 한가위 보름달이 뜬 밤에 잡다한 수다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던 그는 꽤 편안한 이성친구였다. 가끔씩 내가 직장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한껏 풀어놓을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준 친구이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마음 편하게 그런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와는 아주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다가 갑자기 연락을 해도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가끔씩 공연과 전시회를 보러 서울에 올라가곤 했는데, 그때 그는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자주 연락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때 나는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그에게 카카오톡으로 '지금 서울로 가고 있으니 시간 되면 보고 안되면 나 살짝 다녀갈게'라고 보내곤 했었다. 말 그대로 시간 되면 보고 아님 말고 하는 그런 내용이었었는데, 그는 조금 후에 항상 답장을 남겼다. 내가 언제쯤 도착하는지 묻고는 자신이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해서 알려주곤 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렇게 느닷없이 연락을 했을 때에도, 그는 열에 여덟 번쯤은, 잠깐이라도 꼭 나를 만나러 나오곤 했었다. 내가 매번 서울에 갈 때 그를 생각하고 연락했던 것처럼, 그도 내게서 연락받으면 가급적이면 나오려고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나도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도 내게 그랬었나 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의 직장이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얘기하지 않으면 가족 얘기나 다른 어떤 것도 묻지도 않았다. 내가 내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다. 그나 나나 자신에 대한 얘기는 지나가듯 흘리는 편이어서, 서로가 지닌 기준에서 지나치게 사적인 얘기들은 그다지 많이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그렇게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먼 곳에 사는 속 깊은 이성친구로 꽤 오랫동안 친구관계를 유지했다. 서로에게 크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편안한 친구 사이로 남기를 바랐지만, 역시 남녀 간에 친구 사이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시간을 최대한 맞이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회피하며 지냈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우리가 사귀자는 말을 공식적으로 하지 않은 것은, 둘 다 서로에게 다가가기에는 부담스러웠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어릴 때 만났었더라면 쉽게 사귀고 헤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게 쉬운 사이로 지내기엔 세상사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고 약아버렸으며, 결정적으로 서로에게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서먹해져 버린 사이에서 서로의 카카오톡도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었고, 그의 답장도 드문드문해졌다. 한동안은 내가 연락을 자주 하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보내는 연락이 그에게 부담이 되었겠다는 생각, 어쩌면 그는 내게서 오는 카카오톡을 차단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에 대한 내 마음도 일정 부분 닫혔고 그리하여 나도 그에게 더 이상은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그저 그렇게 연락을 끊음으로써 나와의 모든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표현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잠수 이별'에 대해, 상대방에 대한 무례라고 평했다. 혼자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이라 말하면서. 그런데 우리는, 공식적인 연인 관계도 아니었으니 '잠수 이별'이라는 명칭도 어울리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내게 가진 마음이 내가 가진 마음과는 다른 깊이, 다른 종류였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내게 관심이 없었다.' 좀 씁쓸하지만 정곡을 찌를 필요는 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좋은 추억으로 남은 사람이 너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