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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Jul 13. 2024

혼자 여행의 선물은 아주 가끔 받는 것

옛 중앙선 통일호를 타고 떠난 나 홀로 경주여행

지금이야 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90년대 초반만 해도 혼자 국내 여행을 간다는 것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여행을 어떻게 혼자 가?'라는 질문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부터 내가 혼자 여행 떠나는 것을 추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그때 무슨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홀로 경주 여행에 도전하게 되었다. 초등학교-오래전이니까 국민학교라 해야 하나-시절의 수학여행지에 지나지 않았던 경주에 왜 그리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박물관이나 유적지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마 그때의 여행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직선화와 복선화가 되고 고속철이 다니지만, 당시에 경주까지 가는 중앙선은  단선 철로의 느린 기찻길이었다. 물론 조금 더 빠른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있었지만 아직 학생이었던 터라 통일호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통일호보다 더 저렴한 비둘기호가 아직 운행 중이긴 했었지만, 느린 통일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좌석도 불편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나이 든 사람들의 추억 속에나 존재하는 열차인 비둘기호는 2000년에, 통일호는 2004년에 운행을 중단했다.) 어쨌든 그날 아침 일찍, 완행열차인 통일호를 타고 혼자 경주로 향했다. 말했다시피 단선 철로였던 중앙선에서, 내가 탄 하행선 통일호 열차는 반대편에서 서울 청량리로 가는 상행선 열차를 만나면 선로를 양보해 가며 경주로 향했다. 이제는 폐역이 되어버린 거의 모든 역에 정차한 완행열차가 드디어 고풍스러운 기와를 인 경주역에 도착했다. 당일치기 여행이어서 빠르게 움직여야 했지만 경주 지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뚜벅이 여행자라 역 앞 관광 안내소에서 지도를 받아 들고 오늘의 행로를 구상해야 했다. 당시 경주역 광장 한쪽에는 3층 석탑이 놓여있었다. 당연히 원래 자리가 그곳이 아니었을 이 탑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이름은 황오동 3층 석탑이다(원래 있던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이 탑이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경주역사가 지어진 1930년대 일본인들이 역 광장을 꾸미고자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경주의 고풍스러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믿고 신성시했던 불탑을 한낱 장식물 정도로 생각하며 우리 문화재를 업신여긴 일본인들의 수작으로 보기도 한단다). 검게 그을린, 약간 기운 듯한 탑을 보고 설명을 읽고 있는데, 어디선가 '탑이 좀 기울었죠?' 하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는 신라 문화원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그는 꽤 상세하게 문화재를 설명해 주었고 그 지식의 깊이도 얕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하루, 나는 낯선 사람과 경주 도보여행을 했다. 경주역에서 걸어가면 도달하는 대릉원, 첨성대, 월성, 동궁과 월지, 그리고 터만 넓게 남은 황룡사터까지, 특히 황룡사 터는 지금처럼 그렇게 정비되지 않았고 그 앞의 논길을 따라 들어갔는데 그 자체도 운치가 있었다. 그날  날씨도 좋았고, 당시 경주의 맛집이었던 쌈밥집에서의 식사도 풍성하고 좋았다. 낯선 이와의 예상치 못했던 경주 산책은 꽤 만족스러웠다. 다만, 집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놓쳐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 흠이었다면 흠이었겠지. 그때 재빠르게 버스 터미널로 나를 안내해서 마지막 버스를 겨우 타게 도와준 그는 그날의 꽤 괜찮았던 동행이었다. 지금 같으면 연락처를 주고받았을 테지만, 아직은 아날로그 시대였던 그때는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그날의 동행은 내 20대의 기억 속 괜찮았던 사람으로 남아서 가끔 미소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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