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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Jul 06. 2024

그때 우리 학교는

그때가 그리운 건 아니지만

내 모교는 80년대 중반에 개교하여 이제 사십여 년쯤 되었다. 내가 다니던 시절만 해도 한 학년에 8 학급, 학급당 학생수는 거의 50명에 가까워서 세 학년이 모이면 천명이 넘는 꽤 큰 학교였다. 지금이야 학년당 5 학급에 학급당 학생수 20여 명, 내가 다니던 시절의 한 학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학교가 되어버렸지만, 그것은 어느 소도시들이나 다 겪는 인구 감소의 여파이니 어쩔 수 없다.

우리 학교는 당시 시내와는 동떨어진, 도시의 남쪽을 흐르는 강 건너편에 있었다. 시내에서 학교 쪽으로 가는 버스는 단 하나의 노선이었고, 그 버스가 시내로 오는 막차는 오후 7시 반이어서 그것을 놓치면 300미터는 족히 걸어 나가야 시내로 나가는 다른 노선의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걸어 나갔어도 그곳에서 탈 수 있는 버스들의 막차 시간이 밤 9시 이전이라 이래저래 우리 학교에서는 시내로 오가기가 불편했다. 사립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3대의 학교 버스를 운용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학교 버스에 콩나물시루처럼 꽉꽉 들어차서 등하교를 했다. 그나마 고 3 땐 학교 버스 기점이라 늘 앉아서 등교하는 여유도 있었지만. 지금 학생들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오전 7시 반부터 자율학습, 9시부터 4시 반까지는 정규수업, 청소 후 보충 수업, 저녁 식사 후 야간 자율 학습까지 마치면 고 3 때는 밤 11시에나 하교할 수 있었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모든 학생들이 그랬었고 그 시절 우리에게는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 학교는 그 소도시의 신설학교였었다. 그래서 당시 어느 학교보다 시설이 좋았고, 내가 입학했을 때는 이미 몇 회의 졸업생이 있었던 터라 교정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예뻤다. 지금도 그 학교의 부지는 넓지만 그땐 더 넓었었다. 여고였지만 운동장 한편에는 100미터 경주 레인 6개를 그릴 수 있었고, 그에 접하여 200미터 트랙이 있었다. 체육 시간이면 체육 선생님께서 준비 운동으로 줄을 세워 200미터 트랙을 따라 군사훈련 같은 뜀걸음을 시키셨다. 달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선생님은 구호와 같은 노래를 선창 하시고 우리에게 따라 부르며 달리게 하셨다. 그래서 체육 시간엔 모두가 투덜이 스머프가 되곤 했지만, 어쨌든 운동장에선 하루에 서너 번씩 '뒷동산의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이 울려 퍼졌다. 그 운동장의 한쪽 편에는 전교생 천여 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스탠드가 있었고, 200미터 트랙 너머에는 체육대회 때 잠깐을 제외하고는 여고생들은 거의 쓰지 않는 농구장과 씨름장도 있었다. 실제로 모교 운동장은 400미터 트랙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본관 건물은 요새 찾아보기 힘든 일자형 건물에 각 층마다 10개의 교실이 있어서 8개는 교실로 사용되었고 층마다 남은 2개실은 정확히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중 한 층에 있었던 교실은 미술실이었다. 미술실 선반 위에는 아그리파 흉상 같은, 데생에 필요한 여러 물품이 얹혀 있었다. 1층엔 교장실, 교무실, 행정실-아마 그때는 명칭이 서무실이었던 것 같다-과 방송실, 독서실 형태의 자율학습실이 있었고  지하 1층엔 넓은 회의실이 있었는데 평소엔 자율학습실로 사용되었다. 교실은 양쪽 끝의 계단과 중앙 현관 계단으로 출입할 수 있었는데, 양쪽 복도 끝에 설치된 커다란 철문을 굳게 닫으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가 웬만큼 차단되었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야간 자율 학습을 제일 먼저 마치는 1학년이 4층, 그다음인 2학년이 3층, 마지막으로 밤 11시가 되어야 하교하는 3학년이 2층을 사용했다. 그리고 선배 학년의 자율학습에 방해되지 않도록 후배 학년들은 조용히 하교하는 것이 예의였고 그 예의는 잘 지켜졌었다.

본관 옆에는 작은 탑이 있는 정원에 등나무가 우거진 벤치가 있어서 점심시간에 충분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고, 1년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었던 서쪽 단독 건물 예절실은 기숙사가 완공되기 전에 기숙사로 활용되었다. 운동장 스탠드 위 동쪽 부지에는 전교생이 앉을 수 있는 2층 관람석이 있는 정규 핸드볼 경기장 크기의 커다란 실내 체육관이 단독 건물로 서 있고, 그 앞의 화단에서는 5월이면 붉은 작약이 탐스럽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 옆에는 가사실, 정보실(그때는 전산실이었다), 음악실과 급식실이 있는 또 다른 단독 건물이 있었다. 예절실을 기숙사로 사용했던 학생들을 위한 급식실이었는데 이 건물 뒤쪽으로 내가 2학년 때 기숙사가 지어졌다. 우리 학교가 사립이었학교법인의 재정이 꽤 탄탄한 편이어서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요즘의 도시에 있는 학교들과 달리 저렇게 넓은 부지를 쓸 수 있었던 것도, 학교 부지가 도시 외곽인 데다 지대가 높지 않고 그래서 부지를 크게 매입했던 학교 법인의 재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설이 좋다고 해도 학교는 학교였고 집에 있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학교에 있어야만 했던 우리에겐 답답한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지하에 매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학교 급식이 없던 시기, 매일 도시락 2개를 싸다녔지만 점심 저녁식사 모두 같은 반찬만 먹어야 했기에 간식의 달콤함을 전해주는 매점은 요즘 표현으로 '사랑이었다.' 매점 판매원은 '매돌이 오빠, 매순이 언니'로 불렸는데 여고였던 만큼 '매돌이'의 인기가 꽤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매점 옆에는 사방이 거울로 가득한 무용실이 있었다. 체육 수업 중에 무용 수업이 있었고 그래서 그 무용실도 1학년때는 주 사용했었다. 지하 무용실이라 가끔씩 무서운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우리 학교는 꽤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 학교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 것은 가을의 축제였다.

교목인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학교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축제는 예술 발표회 형식이었고 각 학교마다 고유한 이름을 붙여서 '00제'로 불렸다. 시화전과 미술 작품들은 그 숫자도 많았지만 수준도 꽤 높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아노나 다른 악기, 성악 등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독주 무대로 구성된 발표회는 웬만한 클래식 음악회 수준이었다. 합창단의 합창도, 성악 전공하는 학생들 몇몇이 포함된 중창단의 중창도, 무용 전공으로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발표 무대도 그 수준과 기량이 꽤 높았다. 지금 같은 댄스와는 조금 결이 달랐지만 댄스 동아리의 공연과 연극 동아리의 연극이 무대를 꽉꽉 채우는 종합 예술제인 축제였다. 그 당시 시내 고등학교 축제의 레퍼토리는 거의 유사했지만 특히 우리 학교의 예술제는, 신설 학교라 개최 횟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꽤 유명했다. 게다가 예술제 기간엔 꼭 닫혀있던 여고가 개방되니 당연히 남고 학생들의 성지가 되기도 했고. 그렇게 우리 학교는 내 기억 속에 매력적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그 당시 우리는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분명히 자유롭지 못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고, 학생인권이 지금처럼 향상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부당한 대우도 많이 받았다. 체벌이 허용되어 있었고, 두발 및 복장에 대한 엄격한 지도를 받았다. 내신성적에 반영되는 월례고사-월말에 치는 시험-를 비롯해서 사설모의고사 포함 거의 매달마다 평균적으로 두 번씩은 시험이 있었던 때라 공부도 허덕이며 해야 했었다. 교육과정 상 지정된 교과에 대한 공부만 했었으며, 주입식 교육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에 대해 반기를 들 정도의 자유는 허용된 적이 없었다. 단지 공부하는 기계에 가깝게 고등학교 3년을 학교에서 보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그때를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의 학교는 그랬다.

지금도 고향집에 갔다가 강변 둔치로 나오면 강 건너편에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당당히 서 있는 모교를 볼 수 있다. 그때 우리 학교는 강 건너편에 외로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이 소도시의 강남 개발 덕에 학교 뒤편엔 아파트 단지가 솟아 있고 법원 등의 관공서가 이전해 있어서 더 이상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치맛바람이 세어진 학교가 되지는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학생수가 적어서 고요한 학교가 되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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