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므두셀라 증후군'
각자의 느낌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학창 시절은 아련한 기억인 걸로
고등학교 때의 기억은 이제 너무나 먼 추억이다. 어떤 것은 좋은 추억이지만 어떤 것은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약간씩의 '므두셀라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특히 유년 시절이나 학창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때는 좋은 것만 기억하고자 하는 일종의 기억 왜곡을 동반한다는 도피심리. 나 역시도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추억은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으로 나뉘지만, 그래도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성향이 늘었다. 굳이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어 봐야 내 마음만 불편할 뿐이니까.
친한 친구들과만 어울리던 때여서 한 학년의 400명 가까운 아이들과 다 친할 수는 없었다. 동네 친구들이 각기 중학교는 달랐지만 어쩌다 보니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어 그들과는 기본적으로 잘 어울렸었고, 또 중학교 때 새로이 친해진 친구들도 같은 학교에 다녀서 고등학교 생활이 딱히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다지 평범한 성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 친구들이 한창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를 열심히 들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좋아했던 연예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쪽에는 냉담했던 편이라고 해야 할까. 고등학교 때 한창 유행했던 것이 하드보드지로 필통 만들기였는데, 대부분의 친구들이 잡지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사진을 오려 붙여 필통을 만들었는데, 나의 필통에는 신윤복이나 김홍도와 같은 조선시대 화원들의 그림을 오려 붙였기에 다른 친구들의 필통과는 조금 달랐다. 공부는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뒤처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수학은 많이 뒤처지는 편이어서 문제긴 했지만. 친구들과는 그럭저럭 잘 지내는 편이었지만 성향이 다른 친구들은 어쩌면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건 나 역시도 그들에게 같은 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중 3년 동안 같은 반이 되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는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2년 동안 같은 반이었어도 그 친구와는 거의 얘기를 하지 않았었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랐고 한 반에 50명 가까운 친구가 있어서 굳이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 친구와 내가 성향이 그리 안 맞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3학년이 되었던 어느 날인가, 그 친구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던 기억이 난다. 3년이나 같은 반이 되었는데 잘 지내보자는 그런 얘기였던가. 어쩌면 나는 그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쁜 데다 공부까지 잘하는 새침한 여학생이었던 그 친구에게. 나 역시 그리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학에 있어서는 그 친구가 나보다는 월등했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다가 3년이나 같은 반이 되어보니, 처음엔 별로였지만 그다지 나쁜 애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이제는 친구로 지내도 되겠구나 하는 판단이 섰기에 그렇게 말을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 말고도 우리 반에서는 이미 친한 친구들이 많았기에 갑작스러운 그 친구의 반응이 조금은 새로웠지만 뭐 나쁘지는 않았다.
당시의 고 3 생활은 지금보다 더 억압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주 5일제가 아니어서 토요일 오전까지 학교 수업이 진행되었고, 3학년은 토요일 오후는 거의 강제적인 자율학습(?)이 있었다. 일요일에는 원하는 학생들이 자율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학교가 개방되어 있었다. 어느 금요일 종례시간이었던가. 다음날인 토요일은 '상추쌈 먹는 날'을 하자는 제안이 3학년 1반에서 나왔다. 생각해 보니 그때 당시에 선생님들 몇 분이 수업 없는 시간과 점심, 저녁 시간에 학교 텃밭에 상추를 키우고 계셨는데, 그 텃밭 농사가 잘 되어서 아마도 학생들이 상추를 소비해 주길 바랐었던 것 같다(아, 이건 나의 오래된 기억과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날 점심 도시락은 각자의 밥과 간단한 반찬에 집에서 갖고 온 쌈채소와 학교 텃밭의 상추가 합해져 3학년 8개 학급이 모두 즐겁게 상추쌈 싸 먹는 진풍경을 벌였다. 그리하여 오후 자율학습은 상추쌈의 여파로 모두가 졸다 깨다를 반복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심심하던 고 3의 일과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기도 했다.
우리 학교 부지는 꽤 넓은 편이었다. 학교 부지 안에 복숭아였는지 살구였는지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과수원도 있었던 것 같다. 학교 중앙정원에서 보면 과수원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긴 했으나 굳이 나는 올라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간혹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학생들 일부는 과수원에서 서리를 하곤 했었다. 지금은 감히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조금씩의 과일 서리를 눈 감아주셨던 것 같다. 기껏해야 한 두 명 정도가 작은 주전자 하나 채울 정도로만 서리해 왔었던가 그랬으니, 과수원 주인의 입장에서도 땅주인이 학교인 데다가 매출에 크게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어서 그냥 넘어가 주셨던 것 같다. 지금은 그 과수원과 본관 뒤의 테니스 장, 기숙사 뒤쪽 산이었던 곳이 모두 개발되어 학교 주변은 아파트 단지로 채워져 있지만, 여전히 학교는 강 건너편에 그 모습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분명히, 이런 재미있고 아련한 추억 뒤에는 절망스럽고 부당했던 시기도 있었다. 기억해 보면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조금은 서글펐던 시기가 아마 학창 시절인 듯하다. 대부분의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이 내게도 그것은 아마 당시의 집안 사정이었거나 친구문제였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 나의 성적을 두고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평범한 성인이 되면서, 어느새 나는 서글펐던 시기와 그때의 기억은 점차 잊어버리게 되고 좋았던 것만을 생각하려 애쓰는 '어린 므두셀라'가 되어있었다.
*므두셀라: 에녹의 아들이며 라멕의 아버지요, 노아의 할아버지이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 중 최고령인 969년을 살았다고 한다(창세기 5:2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