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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나소스 산 자락의 장엄한 신전

태양신 아폴론 신탁의 도시 델피(델포이)

by 낮은 속삭임

숙소의 발코니에서는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아크로폴리스의 한편에 장엄하게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점차 기울어가는 햇살이지만 아직은 환하고 뜨거운 아테네 시내로 나왔다. 숙소 근처의 길이 조금 미끄러웠다. 일반 보도블록도 있지만 대리석처럼 보이는 매끄러운 돌들도 있어서 버켄스탁 샌들이 편하지는 않다. 사실 경사가 조금 심했던 작은 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순식간에, 눈길에 슬라이딩하듯이 넘어졌는데 아픈 것보다야 쑥스러움이 가득. 다행히 지나가는 이는 많이 없는 곳이었다. 내일 델피 투어 모임 장소를 확인하고는 다시 아크로폴리스역 쪽으로 나왔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부산히 다니는 관광 중심지이다. 보행자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 그 가운데 일정 부분을 차지한 음식점 야외석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아테네를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 걷다 보니 유적지도 있고 성당도 있고.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테네 대성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라 느낌이 조금 다르다. 외관도 그리고 실내도, 어딘가 조금 낯설었다. 그 낯선 느낌이 싫은 것이 아니라 흥미로웠다. 성당 앞 광장은 광택이 있는 석재를 깔아서인지 성당을 어슴푸레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성당을 정면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골목 입구에 'Welcome to Plaka'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아까 전에 내가 걸었던 골목과 연결된다. 아까 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조금씩 부드럽게 기울어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아테네의 첫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시차 탓인지 여기 시간으로 새벽 세시 반쯤 눈이 떠졌다. 시차는 늘 적응하기 힘들지만 매일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재미도 있다. 며칠간은 이렇게 새벽에 눈을 뜨겠지만.

일정 상 오늘은 델피 일일 투어를 다녀오는 날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가장 권위 있고 믿을 수 있는 신탁이라는 아폴론 신탁이 내려지는 곳이 이곳 델피이다. '델피의 신탁'으로 유명한 이곳은, 태양의 신이자 음악의 신, 예언의 신인 포이보스 아폴론의 예언이, 퓌티아의 무녀를 통해 내려지는 신성한 곳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반드시 참배하고 허락을 얻었던 곳이 이곳 델피이다. 델피 아폴론 신탁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끔찍한 운명,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이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이곳에 직접 가본다는 것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출발 장소인 키투어(Key Tour)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키투어는 아테네와 아테네 근교 여행 투어 상품을 진행하고 있어서 그 앞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직원에게 예약 사항을 보여주니 이름을 부를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투어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시끌벅적한 사무실 한편에 있는데 한 직원이 다가와 어색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모음 'ㅓ'가 들어가기 때문에 내 이름은 항상 제대로 불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여행지에서 여러 번 그렇게 불렸더니 이제는 익숙해졌다.

투어에 참여한 동아시아인은 나밖에 없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에 대부분 가족 단위의 외국인들이 참여했다. 델피까지 가는 길은 꽤 멀다. 마라톤 평원을 지나고 오이디푸스 비극의 도시 테베를 지나쳐 이어지는 길. 멀리 보이는 독특한 석회암 산이 파르나소스 산이다. 산이 멀리 보이는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다시 델피로 향한다. 보크사이트가 산출되어 알루미늄으로 가공되는 공장이 있는 이 산은 돌산이어서인지 마치 불모지처럼 보인다.

그 협곡의 중턱에 위치한 델피의 아폴론 신전은 그 앉음새가 어마어마하다. 이곳까지 신탁을 받으러 오는 이들도 신탁의 위용에 눌릴 정도였을 것이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는 특이하게 생긴 돌이 하나 놓여있다. 물론 진품은 박물관 안에 있지만. 제우스 신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린 새들이 만난 곳, 그리하여 세상의 중심이 된 이곳에 세운 돌, '세계의 배꼽'인 옴팔로스(omphalos)이다.

신전 터에 있는 모조품(좌) / 박물관에 있는 진품(우)

한여름 땡볕 아래의 델피는, 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좋지만 산책은 힘들다. 그래도 극적인 풍광과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인지 힘들어도 흥미로웠다. 델피 박물관은 이곳에서 출토된 것, 델로스 섬의 스핑크스를 비롯한 많은 유물은 소장하고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덕분에 그리스-로마 신화를 복습해보기도 했고.

돌아오는 길에 점심 식사를 위한 레스토랑에 들렀다. 점심을 포함하지 않은 티켓을 구입했기에 이곳에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시켜 먹었다. 치킨 수블라키, 과일과 꿀이 들어간 요구르트에 탄산수. 딱 기분 좋은 점심 식사였다.

델피에서 아라호바 마을을 거쳐 내려오면서 전망이 좋은 곳에서 파르나소스산 아래의 협곡 풍경을 즐긴다. 언젠가는 차를 몰고 이곳에 올 수 있지 않을까. 편안하게 즐기면서.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번 멈춘 버스는 그대로 달려 시내의 몇몇 장소에서 고객들을 내려준다. 그렇게 델피 투어는 끝났다.


나는 종점까지 가게 되어있지만 신타그마 광장에서 내렸다. 아직 환한 시간인 데다가 신타그마 광장 주변엔 볼거리가 많다. 바로 볼 수 있었던 위병교대식은 시간이 좀 늦어서 한 시간 뒤에 보는 걸로 하고 발걸음을 아테네 학술원 쪽으로 옮겼다. 늦은 시간이라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 외관은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건물은 신전처럼 생겼는데 양쪽의 크고 높은 이오니아식 기둥에는 각각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태양신 아폴론이 서 있다. 그들이 내려다보는 자리에는 각각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앉아있다. 이곳은 아테네로 돌아오면 다시 가볼 것이다.

아테네 학술원 옆은 아테네 국립 대학교의 분교인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로 1837년 당시 그리스 국왕 오톤에 의해 설립된 그리스 최초의 대학이라고 한다. 원래 국왕의 이름을 따 오톤 대학교라 명명되었으나, 왕의 퇴위 이후 1862년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아테네 국립 대학교 옆의 건물은 국립 도서관이다. 나란히 서 있는 세 건물은 각각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국립도서관은 고대 아고라 안에 있는 헤파이스토스 신전을 참고하여 설계되었다고 하며 우아한 계단이 아름답다. 도서관 앞의 동상은 이 도서관의 후원자이자 그리스 최대 부호였던 상인 파나기스 아타나시우 발리아노스라 한다.

세 건물 모두 시간이 늦어서 들어가지는 못했다. 물론 어떤 건물은 입장 금지이기도 하지만. 이번 여행의 끝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올 테니 그때 가보는 걸로.

어느덧 한 시간이 흘러 위병교대식 시간이 되어간다. 적절한 곳에 자리 잡고 섰는데 위병들이 걸어 들어오는 장면부터 교대 장면을 정면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느리고 절제된 동작의 위병교대식은 꽤 볼만했다.

내일은 온전히 아테네에서 하루를 보낼 예정이다. 내게는 볼거리가 너무나 많은 곳이라 어떻게 일정을 짜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아크로폴리스 통합권을 구매했으니 그에 따라 움직여보도록 해야겠지.

숙소에 들어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발코니로 나오니 조명을 받은 파르테논 신전이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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