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이, 대책 없이 이스탄불 헤매기
피로했던 탓이었을까. 곯아떨어진 채로 잠들었다가 깨어나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아마도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을 새우고 그 피곤한 비행을 견뎠더니 시차가 적응된 탓이었을까. 호텔의 조식은 조금 떨어진 다른 호텔에서 먹을 수 있었다. 정체 모를 음식들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먹을만했고 입맛에 적당히 맞았다.
나를 헷갈리게 했던 호텔의 이름을 다시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한번 온 곳이라 잊어버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또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니까. 오늘 처음 간 곳은 귈하네 공원. 아마 처음에 왔을 때도 산책을 했겠지만, 그것이 하도 오래전의 일인지라, 귈하네 공원은 새롭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아야 소피아를 가볼지 어떨지 고민했다. 튀르키예의 각종 박물관의 입장료는 어마어마하게 올라 있었다. 아야 소피아만 해도 입장료가 파리의 유명한 미술관보다 더 비싸다. 그리고 박물관이었던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꿔버렸기에 예전처럼 자유롭게 작품들을 감상할 수도 없고, 1층은 신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도 없다. 게다가 머리를 가릴 수 있는 스카프가 없으면 아야 소피아에 들어가지 못한다. 맞은편의 술탄아흐멧 모스크의 경우에는 가리는 스카프를 무상으로 대여했는데 아야 소피아에서는 2유로에 판매하고 있었다(후에 알아보니 술탄 아흐멧 모스크에서도 스카프가 유료였다). 그래서 숙소에 가서 스카프를 갖고 오기로 했다. 사실 아침에 그 스카프를 들었다 놨었는데 결국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기 마련이다. 숙소로 다시 가서 스카프를 가져왔다. 표는 이미 구입했기 때문에 스카프를 두르고 입장하면 되었다. 1층이 입장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2층으로 입장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1층을 내려다보면 이슬람 신도들이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스크이기 때문에, 아야 소피아의 유명한 천장의 성모자 상은 1층에서는 잘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다. 2층에서만 가려진 천 너머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스탄불에 왔기에 들러봐야 할 곳이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즐겁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튀르키예 정부의 방침이겠지만, 굳이 박물관이었던 아야 소피아까지 모스크로 꼭 바꿔야 했을까. 모스크가 아니라 박물관으로 유지하고 입장료를 올렸다면 그래도 좀 덜 아쉬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야 소피아를 나와서 찾아간 곳은 그랜드 바자르. 튀르키예어로는 '카팔르 차르쉬'라 불리는 데 아마 이것은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뜻을 것이다.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시장 구경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낯선 이들의 호객 행위를 그다지 편하게 느끼지 않는 탓이다. 시장을 지나면서 수많은 호객꾼들이 아는 모든 언어로 인사를 한다. 굳이 사고 싶은 물건도 없기 때문에 그저 구경하듯 시장을 빠져나간다.
오늘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시장을 넘어 언덕에 자리한 쉴레이마니예 자미이다. 오스만 제국의 대표적 건축가이자 '중동의 미켈란젤로'라 불렸던 미마르 시난이 지은 이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를 위해 지은 것으로 그 정원에서 바라보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골든혼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자리 잡고 앉으면 여름의 더위까지 잊어버릴 지경이다.
언덕에 위치한 쉴레이마니예 자미까지 오르느라 고생한 나에게 이제 휴식을 줄 시간. 근처에 소위 '뷰 맛집'이라 불리는 미마르 시난 테라스 카페가 있다. 음식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오늘은 일단 첫날이니 풍경값을 치르는 것으로. 골든혼과 마르마라 해, 보스포루스 대교와 해협이 활짝 펼쳐진 그 풍경 아래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니까. 우스갯소리라 하지만 그래서 더 웃픈 현실은 '이스탄불은 지금이 가장 저렴해'라고.
오랫동안 테라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쉴레이마니예 자미에 들렀다가 이스탄불 대학교 쪽으로 내려왔다. 혹시나 해서 대학교 입구까지 갔지만, 대학교 교정은 학생들만 출입할 수 있다는 단호한 얘기를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게 맞는 말이기는 하지. 대학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지 관광객이 구경하는 곳은 아니니까.
대학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베야지드 광장으로 내려왔다. 넓고 깨끗한 베야지드 광장 옆으로 트램 라인이 있다. 어제 이용한 그 트램 라인이다. 그렇다면 저 트램길을 따라가면 술탄 아흐멧 광장으로 연결된다. 트램 라인이 다니는 곳인 데다가 베야지드 광장 부근에는 현지인이든 관광객이든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가 내 눈에 들어온 스타벅스. 커피가 마시고 싶기도 하고 더운데 땡볕에 돌아다녔더니 조금 피곤하기도 해서 에어컨 빵빵한 카페가 필요했다. 다행히 스타벅스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판매하고 있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들고 시원한 카페의 어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 누가 앉았든 별 신경 안 쓰고 스마트 폰으로 놀기. 혼자 여행을 다녀도 절대로 심심할 틈이 없다. 더위에 지쳤을 때 스타벅스는 천국이었다. 한참을 쉬고 나서 술탄 아흐멧 광장 쪽으로 내려왔다. 카이저 빌헬름 분수와 오벨리스크, 똬리 튼 뱀 기둥이 있는 술탄 아흐멧 광장에 들어서니 마음이 편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침에 아야 소피아 입장권을 살 때 뮤지엄까지 포함된 것을 구입했었지. 그래서 아야 소피아 뮤지엄에 입장. 다행히 한국어 가이드 이어폰이 제공되었다. 그래서 아야 소피아의 역사를, 내가 처음 튀르키예 여행을 준비할 때 열심히 공부했던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야 소피아의 유물들도 볼 수 있어서 나름 괜찮았다.
뮤지엄을 나와 술탄 아흐멧 자미와 아야 소피아 사이의 분수 공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우연히 자리를 잡았는데 이곳이 사진이 가장 잘 찍히는 곳이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앉은 벤치 근처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그냥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외국인이 여기 앉아도 되냐면 묻길래 앉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 외국인은 좀 전에 스타벅스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고 나도 그를 알아보았기에 우리는 유쾌하게 이야기하면서 놀았다. 그러다 보니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고, 외국인은 저녁노을을 보러 바닷가로 내려간다고 하면서 같이 가겠느냐는 의사를 물었다. 나는 외국에서는 낯선 사람을 기본적으로 멀리하는 편이어서 딱 거절하고 기분 좋게 헤어졌다. 저녁 햇살이 내린 술탄 아흐멧 자미와 아야 소피아는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이제 뭔가 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맵을 검색하여 평점이 괜찮은 식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닭날개와 닭봉 케밥에 아이란을 시켰다. 식전 빵도 같이 나오는데 음식은 맛있지만 혼자 먹기엔 늘 양이 많다. 그래도 역시 닭고기는 딱 좋았다. 치킨엔 맥주가 딱 궁합이 좋지만 오늘은 아이란으로 만족하기. 후식으로 나온 차이와 바클라바도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가기 위해 술탄 아흐멧 광장으로 다시 나왔다. 술탄 아흐멧 자미와 아야 소피아의 야간 조명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숙소가 구시가지에 있어서 다행이다. 이 아름다운 야경을 쉽게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이스탄불의 두 번째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