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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May 12. 2024

어느 날 문득, 시칠리아-넷

시칠리아의 모나리자와 몬레알레의 황금빛 모자이크

팔레르모에서 사흘째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아바텔리스 궁전(Palazzo Abatellis)으로 간다. 시칠리아 주립 미술관으로 운영되는 이곳에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시칠리아 메시나 출신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수태고지(1475)>가 바로 그 작품인데, 이 그림의 '수태고지'의 도상이라고는 여인이 머리에 두르고 어깨를 가린 푸른 베일과 그녀의 앞에 놓인 성경 밖에 없다. 성모의 순결을 말해주는 백합도, 그녀의 성스러운 잉태를 알려주는 가브리엘 천사도 없다. 캄캄한 방의 어느 곳에서도 책장을 일으킬 바람은 없는데 그녀의 책장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그 흔들림은 그녀로 하여금 옷깃을 바로잡고 시선을 성경에서 앞으로 돌리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녀의 책장을 넘긴 것이 가브리엘 천사의 현현(顯現)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모호한 표정은 신비로운 느낌을 담고 있어서 '시칠리아의 모나리자'라 불리고 있을 것이다.

<수태고지(1475)>, 안토넬로 다 메시나

작자 미상의 <죽음의 승리(1450년 경)> 병원 예배당 벽면 전체를 덮고 있던 작품으로 말을 탄 해골로 묘사된 '죽음'이 가난한 자들은 살려주고 부패한 성직자와 부자들을 죽음으로 단죄하는, 지극히 계시록적인 내용을 담아낸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죽음의 승리(1450년 경)>, 작자 미상
아바텔리스 궁전 미술관(시칠리아 주립 미술관)

아바텔리스 궁전은 팔레르모 항구에 가깝다. 항구 쪽으로 나오면 넓은 길이 보이고 그 너머로 정박한 배들도 보인다. 시간이 한정된 여행자들을 위해 팔레르모 시내를 훑어볼 수 있는 꼬마기차가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오히려 저것을 타고 팔레르모 시내를 둘러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구름이 살짝 낀 하늘 아래 꼬마 기차는 귀엽게 달리고 있었다.

팔레르모 대성당으로 가기 위해 도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는 길에 보이는 도시의 건물들은 낡고 쇠락해 보이지만 또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여 오히려 편안하다.

팔레르모 대성당은 독특한 양식을 지닌 성당이다. 약 600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이기에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재한다. 비잔틴 양식으로 시작하여 바로크 양식과 고딕양식, 이슬람 양식까지도 존재하기에 건축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성당의 테라스에서 팔레르모 시내를 내려다보기 위해 티켓을 구매하여 테라스 쪽으로 올라간다. 지붕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은 한 명 정도만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안내인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질서 있게 통제하여 안전하게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다. 성당 지붕에 올라가면 팔레르모의 모습이 고스란히 내려다 보이고 그 장면 하나하나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새롭다. 분명히 시칠리아는 현재 이탈리아에 속하지만, 과거에는 시칠리아 왕국 단독으로 존재했고 그만큼 부강했기에 본토와는 다른 새로운 느낌이 오히려 강했다.  

팔레르모 대성당

팔레르모의 마지막 날 오후는 도심에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몬레알레에 다녀온 후 팔레르모 시내를 산책하며 보내기로 했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모자이크화가 바로 이 몬레알레 대성당에 있기 때문이다. 몬레알레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성당에서 나와 오른쪽을 계속해서 걸어간다. 미처 방문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노르만 궁전이 있다. 이곳의 예배당 카펠라 팔라티나에도 유명한 황금모자이크가 있다고 하니 몬레알레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들러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물론, 늦게 가면 꽤 긴 줄을 서야 한다고 하니 일찍 움직여야겠지.

노르만 궁전

시차로 인해 피곤하지만 않았어도 꼭 방문했을 노르만 궁전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그 방문을 미루고, 궁전 옆에 이어져 있는 포르타 누오바 아래를 지나 버스를 타러 간다.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는 '새로운 문'이라는 뜻이지만, 16세기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카를 5세가 튀니지와의 전쟁에서 승전하여 세운 문으로 지어진 지 400년이 훌쩍 넘은 문이다.

포르타 누오바

이 문을 나서면 문 안의 구시가지와는 다르게 버스들이 다니는 일반적인 도로와 만난다. 인디펜덴차 광장 부근의 버스 정류장에는 몬레알레로 가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면, 덜컹거리는 만원 버스는 천천히 달려 팔레르모 시내가 멀리 보이는 언덕의 마을 몬레알레에 도착한다.

몬레알레에서 바라본 팔레르모는 고요하고 예뻤다. 몬레알레 대성당은 내부 수도원 정원도 유명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팔레르모의 풍경도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몬레알레 대성당을 찾은 이유는 이 성당에 있는 거대한 모자이크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점심 휴식 시간이라 오후 두 시 반에 성당 문이 열리기 때문에 부근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성당 측면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시칠리아식 가지 요리인 카포나타와 왕새우 구이에  스프리츠 아페롤, 그리고 화이트 와인. 스프리츠 아페롤의 색깔이 무엇보다 아름답다.

식사를 끝내고 나니 성당 입장 시간이 다 되었다. 몬레알레 대성당은 측면으로 난 문으로 입장하며, 모자이크화를 보고 본당만 둘러볼 경우 무료이다. 측면 문으로 입장하면 높은 천장에 화려한 황금빛 모자이크화가 빛을 발한다. 성당 중앙을 장식하는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화는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Christ Pantokrator, 전능하신 그리스도)'라 불린다.

몬레알레 대성당

성당 내부를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황금빛의 모자이크로 꾸민 예술가들의 신앙심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다. 그들의 표현으로 인해 무지한 서민들조차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신실하게  지킬 수 있었을 테니.

몬레알레 대성당을 나오니 이제 해가 조금씩 기울어간다. 내일이면 팔레르모를 떠나야 하니 미처 들르지 못했던 시내 산책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시차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팔레르모의 밤을 더 즐겼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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