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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May 11. 2024

어느 날 문득, 시칠리아-셋

<시네마 천국>의 어린 토토를 찾아간 체팔루

긴 비행시간이 끝나고 팔레르모에 도착했다. 숙소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직 주현절 전이라 이곳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초저녁일지도 모르겠지만. 숙소는 건물 꼭대기층에 위치한 아파트였다. 아마 5층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나라 식으로는 6층이었던 듯하다. 비행시간에 지쳤던 것인지 숙소에서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방에서 거실 겸 부엌으로 가는 통로의 창문 너머로 팔레르모의 아침이 시작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푸른 하늘이 조금은 있는 것으로 보아 비는 올 것 같지 않다.

숙소에서 바라본 팔레르모

오늘은 간단히 식사를 하고 체팔루로 간다. 낯선 이름으로 들리겠지만, 영화 <시네마 천국(1990)>을 본 사람들이라면 들어봤을 이곳이 다행히 팔레르모 근교이다. 숙소에서 기차역까지 그리 멀지 않아서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를 고를 때 도심으로 선택했었는데 정말 도심에 있었나 보다. 팔레르모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콰트로 칸티와 프레토리아 분수가 도보 5분 만에 떡하니 나타났다. 콰트로 칸티(Quattro Canti)는 '네 개의 모서리'라는 뜻으로 팔레르모 도심 한가운데의 사거리를 일컫는 말이다.

콰트로 칸티
프레토리아 분수

십여 분쯤 걸었을까. 중앙역에 도착했다. 기차표를 알아보니 가까운 시간의 차표는 매진이었고 한 시간 반쯤 후의 표가 있었다. 표를 구입하고 근처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크라상으로 잠시 쉬었다가, 역 부근에 있는 팔레르모의 큰 시장인 발라로 시장을 잠시 둘러보았다. 겨울에도 따스한 지중해 지역이라 그런지 과일과 채소도 많았고, 섬이어서 그런지 해산물도 풍부했다. 노점에서 파는 먹거리들도 풍성하여 보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팔레르모 발라로 시장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이제 체팔루행 기차를 탄다. 체팔루행 기차를 탈 때는 반드시 진행 방향의 왼쪽에 앉아야 바다를 보며 갈 수 있다. 그것을 깜박하고 오른쪽에 앉았는데 오른쪽의 풍경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푸른 티레니아 해-시칠리아 북부 지중해- 바라보며 가는 것이 더 낭만적일 것이다. 체팔루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기차 진행 방향 쪽에 우뚝 솟은 산 라 로카. 저곳을 먼저 올라가야 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바다에 끌렸던 탓에 라 로카는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체팔루 역에서 올려다본 라 로카

역을 빠져나와 많은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바다 방향이다.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보인다.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은 거의 가물가물하지만, 어린 토토의 추억 속 장소로의 여행은 내게도 설렘을 안긴다.

체팔루 항구 쪽으로 내려가는 길

바다 쪽으로 내려가다가 앙증맞은 차 한 대를 만났다. 유럽에서는 큰 차보다 이렇게 작은 차들을 더 많이 보게 된다. 가게, 거리와 잘 어울리는 차를 찍고 있자니 가게 안에서 차 주인이 나오더니 운전석에 시승해 보라고 한다. 얼떨결에 운전석에 앉아본 느낌은 의외로 편했다.

가게 앞의 앙증맞은 하얀 자동차

잠깐의 유쾌한 상황을 즐긴 후 바다 쪽으로 계속 걷는다. 체팔루 항구 방향이다. 1월이라 아직 바다가 차가운데 물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산책하거나 해변에 앉아 책을 읽고 있거나 했지만. 바다는 차가웠지만 바람은 그리 차갑지 않았고 날씨는 적당히 따스했다. 포르타 마리나로 가는 길은 딱 걷기에 좋은 따스한 지중해의 겨울이다. 우리나라의 차가운 칼바람에 비하면, 이곳 사람들에게는 찬바람이겠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스한 봄바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건물 밖으로 곱게 널려있는 빨래들조차 다정하게 느껴진다.

포르타 마리나 쪽으로 난 골목길을 걷다가 보면 독특한 유적이 하나 나온다. 그대로 들어가면 옛집이 나올 것 같지만 물이 고여있는 데다 약간의 하수구 냄새가 나긴 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는 곳이다. 반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간 그곳은 중세 빨래터(Lavatoio Medievale)라 불린다. 수세기 동안 체팔루 사람들의 공공 빨래터인 이곳은 산에서 내려온 민물로 빨래를 하고 오수는 바다로 흘려보내는 구조로 되어있다. 마치 제주도의 용천수가 활용된 것처럼 시칠리아에서도 그렇게 생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곳 역시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화산섬이니 그 생활 방식이 아예 다르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중세 빨래터 유적

체팔루의 골목길은 다정하다. 곱게 포석이 깔린 길 양쪽으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과 사람들이 사는 집들, 음식점들이 열려있고, 골목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약간 구름이 끼어 있어도 온화한 느낌으로 펼쳐져 있다.  

체팔루의 골목길

포르타 마리나에는 1570년에 복원된 포르타 페스카라가 있다. 바다를 향한 이 아치형 문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새롭다. 이 풍경은 SNS에서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끝까지 걸어가면 카포 마르키아파바 요새를 잇는 아치형 문이 세워져 있다. 마치 하늘과 바다로 향한 문인 듯, 그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생샷을 남기고 있었다.

포르타 페스카라
카포 마르키아파바 요새 아치형 문과 전망대

카포 마르키아파바 요새를 등지고 서서 위를 바라보면 당당한 라 로카가 눈에 들어온다. 그 든든한 산 아래에 펼쳐지는 체팔루는 그림처럼 아름답다. 어린 토토가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가 이것이었을 테지.

라 로카 아래의 체팔루

이제 바닷가에서 체팔루 대성당 쪽으로 향한다. 성당으로 가는 골목길 끝에 성당이 보인다. 골목길은 고요하고 다정스럽게 뻗어있었다.

노르만 건축 양식의 성당인 체팔루 대성당은 요새처럼 생겼다. 정면의 두 개의 탑은 광장을 온화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휴식 시간이었는지 투어 안내소와 성당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 있는 그대로 즐기도록 하자. 여행은 언제나 변수가 발생하는 것이니 꼭 해야 하는 것을 못했다 하여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지론인지라.

체팔루 대성당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을 놓쳤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바닷가 쪽으로 내려갔다. 맛집에 대한 정보를 찾아가는 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구글 맛집과 평점을 참고한다. 성당 앞에도 자리는 많았지만 그다지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포르타 마리나 쪽에 위치한 '아 마리나(A'Marina)'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봉골레 파스타와 스테이크, 화이트와인을 곁들인 평범하지만 맛있는 식사를 외부 테이블에서 즐겼다. 1월이지만 적당히 따스한 바람, 따스한 공기를 즐기면서. 아, 물론 길가인지라 여러 가지 소음도 뒤따라왔지만.

식사를 한 이후에 대성당 쪽으로 다시 간다.  혹시나 성당 내부는 입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시칠리아의 골목길과 그 길의 끝에서 올려다보는 라 로카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가는 길의 어느 기념품 가게에서 시칠리아를 상징하는 트리나크리아를 보게 되었다. 여자의 머리에 세 개의 다리가 있는, 어찌 보면 기괴해 보이기도 하다. 트리나크리아 가운데의 여자는 메두사. 왜 그녀가 이 상징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고 한다. 메두사가 영혼을 지배하는 괴물이라 여겼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져 괴물로 변하게 된 메두사가 시칠리아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대성당 정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당의 중요한 보물인 모자이크화는 보수 중이라 볼 수가 없었다. 성당은 본토에서 보는 다른 성당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고즈넉함과 간결함, 우아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성당을 나와 라 로카로 오르기 위해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다. 지도상으로 라 로카 산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레스토랑이 하나 있는데 내가 올라간 시간에 그 레스토랑이 문을 닫고 있었다. 이 길이 맞지만 오후 4시 이후에는 올라갈 수 없다고, 표지판에도 오픈 시간이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겨울에 라 로카는 오후 4시 이후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 아직 날이 환한데 오르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황당하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다음번에는 꼭 기억해야지. 팔레르모에서 체팔루로 기차를 타고 올 때는 반드시 진행 방향의 왼쪽에 앉을 것, 오자마자 라 로카로 먼저 올라갈 것. 라 로카까지 오르지는 못했지만 언덕 중턱에서 바라보는 체팔루도 그대로 아름다웠다.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부드러운 저녁 햇살이 감싸 안은 아름다운 모습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즐기는 것도 좋았다.

저녁이 깊어가는 해변으로 내려왔다. 서늘하고 기분 좋은 공기가 가득 해변은 사랑스럽게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다. 팔레르모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이 작은 도시에서 깊어가는 저녁. 흘러가는 시간은 언제나 아쉽다. 어린 토토를 찾아간 체팔루. 아리베데르치(arrivedérci).


기차를 타고 다시 팔레르모로 돌아왔다. 저녁이 깊어진 팔레르모에는 많은 이들이 그들의 저녁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노르스름한 불빛을 받은 프레토리아 분수는 너무나 따스해 보였다.

콰트로 칸티에 도착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느 성당으로 우르르 들어가길래 그들을 따라 나도 성당으로 들어갔다. 플루트를 비롯한 관악 앙상블 연주회였다. 이번주 마시모 극장의 공연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우연히 성당에서 열리는 연주회를 보게 되어 기뻤다. 특히 시칠리아 카타니아 출신의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Norma)> 중 유명한 아리아 '카스타 디바(Casta Diva, 정결한 여신이여)'를  이 지역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들었는데, 성당 구조가 그녀의 목소리를 아름답게 울려 퍼지게 했다. 팔레르모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팔레르모에서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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