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팔레르모를 떠나 트라파니로 향한다. 제주도의 14배나 되는, 지중해에서 제일 큰 섬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부엌, 신들의 식탁이라고 불린다. 아마도 그 비옥한 토지와 생산물로 인해 이 섬은 여러 세력의 침입을 받았던 것이 역사에 잘 드러나고 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푸른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바다도 보인다. 들판을 바라볼 때는 이곳이 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먼바다를 보면 섬이라는 실감이 난다. 버스는 트라파니 공항과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난다. 지나는 내내 비가 내렸다가 흐렸다가 해가 났다가 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숙소는 트라파니 시내 쪽이었는데, 정류장이 확실하지 않아 버스 종점까지 가게 되었다. 버스터미널도 아닌 항구의 어느 지점에서 모든 사람들이 내리기에 나도 그렇게 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간 정류장에서 숙소가 가까웠다. 트라파니는 팔레르모보다 더 아는 바가 없다. 이곳에 온 이유는 천공의 성이라 불리는 에리체로 가기 위해서였다. 트라파니는 이탈리아 소금의 주요 생산지로 알려져 있고, 염전의 일몰이 아름답다는 것, 여름이면 이 부근의 섬들, 이를테면 파비냐나와 같은 곳에서 휴양을 즐길 수도 있다는 것 정도만 여행 책자에서 읽고 왔다. 그러나 내가 온 시기는 1월, 지중해의 겨울이다. 비도 자주 내리고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오는 싸늘한 지중해의 겨울. 트라파니에 도착한 오후에도 바람은 엄청나게 불어오고 있었으며, 비도 간간이 흩뿌리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면 더없이 아름다울 지중해의 도시이겠지만, 트라파니의 첫인상은 흐리고 바람 부는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서둘러 에리체로 가는 케이블카의 운행 여부를 알아보았다. 오늘은 바람이 너무 불어 케이블카 운행 취소.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일단 내일 날씨가 좋기를, 그리하여 케이블카를 타고 에리체에 편하게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해 보며 저녁이 내린 트라파니 시내로 나가 보았다. 트라파니는 팔레르모에 비해 깔끔하고 정리된 도시였다. 사람들의 운전 태도도 거칠지 않아서 이곳에서는 운전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레르모나 카타니아 같은 대도시를 벗어나면 오히려 운전하는 것은 우리나라보다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지 않은 것에 대해 처음으로 후회했다. 시내 산책을 좀 더 할까 했는데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비가 내리려나 보다. 숙소 부근의 커다란 마트에서 먹거리와 와인을 샀다. 시칠리아에 왔으니 시칠리아 대표 와인 돈나푸가타를 맛보아야지 않을까. 트라파니에서 멀지 않은 마르살라에는 돈나푸가타의 와이너리가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칠리아에 오면 꼭 방문하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와이너리 투어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저 마트에서 판매하는, 그리 비싸지 않은 돈나푸가타의 레드와인 세다라를 구입했다. 와인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가격에 비하면 꽤 괜찮은 와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커튼을 열고 바라본 창밖에는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케이블카 홈페이지를 열어보았으나, 역시 케이블카 운행은 중단(Chiuso/ Closed)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래도 햇살이 좋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일단 케이블카 역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역까지 걸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오늘은 케이블카 운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엄청나다. 게다가 오늘은 주현절이자 토요일이라 버스도 드문드문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도착한 케이블카 역.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케이블카 운행 중단은 현실이었다. 이제 다음 방안을 생각해야 하는데, 택시를 타고 오르자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면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만만한 두 다리. 걸어서 에리체까지는 두 시간 여의 산행이 필요하다. 신발을 고쳐 신고 에리체로 가는 산길을 택했다. 무모한 도전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길은 그다지 험하지는 않은 산길이었다. 등뒤에서 불어오는 엄청난 바람 탓에 오르는 것은 내 의지에 더해 나머지는 바람이 대신해 주었다. 산길은 에리체로 가는 고대 로마의 길. 그 옛길을 따라 순례자처럼 타박타박 산을 오르는 동안, 등 뒤로는 트라파니의 모습이 점점 더 낮아지며 멀어지고 있었다.
바람 소리를 들으며 두 시간 여를 오른 산길, 이제 조금 떨어진 곳에 도로가 보인다.트라파니 케이블카 역 부근에서부터 에리체까지 올라오는 구불구불한 산길이다. 저 도로를 가로질러 조금만 올라가면 에리체에 도착한다. 더 이상 산길이 아닌 포장도로를 걸어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니 에리체 케이블카 역이 보이고 널따란 주차장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문 앞에 관광안내소가 있다. 이곳에서 지도를 받아 들고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에 산 위의 이 도시로 들어간다.
에리체는 해발 750미터의 에리체 산 위에 지어진 도시이다. 굳이 도시를 산꼭대기에 지은 것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시칠리아 지역에서 일어난 잦은 전쟁과 외침에 대한 방어의 의미로 지어졌다는 것이라고 한다. 에리체로 들어가는 성문을 들어서면 마치 중세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이다. 단정하게 포석이 깔린 골목길이 이어지는데, 커다란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에리체 대성당인 성모승천성당과 그 종탑이다.
에리체의 중요 유적 입장을 위해 통합권이 12유로에 판매되는데, 겨울이라 공사 중인 곳도 많고 폐쇄된 곳이 많아 굳이 통합권을 구입하지는 않았다. 두 시간의 산행과는 다른, 에리체의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이 오히려 아름다운 성당을 구경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일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그리고 화려하고 멋진 성당보다는 수수하고 소박한 성당이 더 매력적일 때가 있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지만.
두 시간의 산행으로 인해 배가 고프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식당으로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쿠스쿠스와 카포나타, 오징어 튀김과 화이트 와인.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좀 남기긴 했지만 음식은 적절히 맛있었고 하우스 와인도 나쁘지 않았다.
에리체의 골목길은 다정하다. 포석이 깔린 고요한 골목길을 헤매다 보면 광장이 나오고 이제 장식이 다 떼어내진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이기도 한다. 열려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기념품을 보기도 하고 가게 안 고양이들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면서 천천히 에리체의 골목길을 즐겨본다. 와인 코르크로 예쁘게 발을 만들어 쳐 놓은 에노테카가 있는가 하면, 시칠리아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얼굴 화분을 비롯한 도자기 제품들까지 구석구석 볼거리들이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마을이 끝나는 뒤쪽 커다란 주차장이 보이는 전망대에 서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몬테코파노-나중에야 그 이름을 알았다-와 티레니아 해의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난다. 해는 조금씩 기울고 있었지만 먼 곳까지 펼쳐지는 풍경은 마치 환상처럼 보였다.
겨울이라 더 높은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 대부분 점검 중이거나 닫혀있다. 그래서 이번 에리체 여행은 산행과 동시에 고요한 이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으로 정했다. 하늘에 더 가까워진 탓인지 구름은 점점 걷히고 있었고 바람 부는 날씨였지만 산책하기에는 딱 적당했다. 특히나 골목에는 조용한 한가로움이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이 적어서 오히려 생각에 잠기기 쉬운 곳이라는 주관적인 평가는, 어쩌면 재미없는 곳이라는 평가로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높은 곳에 위치한 에리체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신비롭다. 햇살은 아래쪽 마을들에 부드럽게 펼쳐지고 바람은 오전보다는 약하게 불어오고 있어서 멀리 보이는 풍경들 모두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골목 안으로 들어오니 길고양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쉬고 있는 장소들이 보인다. 어린 고양이들은 사람을 피해 달아나지만, 조금 큰 고양이들은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골목길의 포석 사이로 이끼가 끼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하는 이곳은, 오래전에 방문했었던 아씨시의 골목길과도 닮은 듯했다.
골목을 내려오다가 어느 집 앞에,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사용되었을 그림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카라바조 그림의 모사화였던 듯했는데, 내게는 크리스마스 트리나 다른 어떤 장식보다 더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깊이 있게 보여주는 듯했다. 이제 곧 저 장식도 다음 크리스마스를 위해 지정된 곳으로 보관될 예정일테지만.
이제 산을 내려갈 일이 남았다. 내려가는 버스를 알아보니 거의 한 시간쯤 뒤에나 올 예정인데, 이 버스가 제시간에 올지 어떨지는 잘 모르는 일. 그래서 그냥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가기로 했다. 올라온 길을 내려가는 것이니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길보다는 쉬운 편이니까. 올라올 때 등 뒤로 점점 더 멀어졌던 트라파니가 내려갈 때는 점점 가까워지고 선명해졌다. 산길이 끝나고 포장도로가 시작되니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숙소까지 가는 길에 해가 저물어 어두워졌다. 트라파니를 제대로 보지는 못하고 오직 에리체만 보았던 오늘. 케이블카가 운행되었다면 트라파니를 좀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은 결국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해 주는 힘이 될 것을 알기에. 다음번에는 날씨가 더 좋은 계절에 트라파니에 방문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내가 몰랐던 트라파니를 좀 더 세밀하게 탐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