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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May 19. 2024

어느 날 문득, 시칠리아-일곱

그리스를 품은 도시 아그리젠토

트라파니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제 아그리젠토로 떠난다. 아그리젠토까지 가는 길은 잘 검색되지 않아 조금 애를 먹었다. 그래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겨주는 정보는 정말 대단하다. 시칠리아는 렌터카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그러나 외국에서 운전한다는 것은 일단 조금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유럽의 경우 대부분의 관광지가 대중교통으로 가기에 편했기에 운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시칠리아 여행은 외국에서의 운전도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것이 너무나 깊이 다가왔다. 특히 아그리젠토로 가는 길이 그랬다. 기차를 타고 아그리젠토로 가는 방법도 있고 버스로 가는 방법도 있는데, 트랜이탈리아는 본토에서도 연착이나 취소가 잦은 편인 데다가 시칠리아에선 오히려 그게 더 심할 때가 있다. 버스의 경우, 시칠리아 섬이 크기 때문에 동부 운행 버스회사, 서부 운행 버스 회사가 각기 다르다고 한다. 아그리젠토는 남서부에 해당되기 때문에, 서부에서 운행하는 버스회사인 루미아(Lumia)버스가 트라파니에서 아그리젠토까지 운행한다. 버스표는 보통 주위의 타바키에서 사는 편인데 여긴 둘러봐도 버스표를 판매하는 타바키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찾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이 버스를 타는 곳이 좀 애매하다. 트라파니 기차역 부근에 버스 터미널 건물이 있는데, 이 버스 터미널은 폐쇄되어 있었다. 어쩌면 겨울이라서 폐쇄된 것이었을까. 마치 버려진 건물 같은 버스터미널 바깥으로 정류장 표시가 되어있고 각각의 목적지가 적힌 작은 표시를 보고 버스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과연 이곳으로 버스가 올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러나 이곳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행히 아그리젠토로 가는 현지 사람들이 있어서 그 자리에서 함께 기다렸다. 버스는 정시에 도착했고, 버스표는 버스기사에게서 직접 구입할 수 있었다. 아그리젠토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있으면 종점인 아그리젠토에 도착할 것이다. 트라파니를 출발할 때는 푸른 하늘이 조금씩은 보였다. 그러나 아그리젠토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점점 더 흐려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그리젠토 시내는 곳곳에 계단이 많은 작은 곳이었다. 숙소 역시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고 내려서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계단을 오르고 내리다가 결국 캐리어의 바퀴가 부서져 버렸다. 이미 트라파니에서 반쯤은 부서진 상황이라 이곳 아그리젠토에서 캐리어를 사야 하는 상황 발생. 뭐 그래도 도착한 이후에 부서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숙소는 비 내리는 날에는 쉽게 찾아가기 힘든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도착하니 마음은 편해지는 듯하다. 아직 비가 내리지만 잠깐 커피를 마시고 휴식하기 위해 카페로 나왔다. 오늘은 아그리젠토 시내를 둘러보기엔 너무 축축할 것 같다. 이런 오후에는 그저 숙소에서 마음 편하게 쉬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가끔 우리에게 필요한 휴식이라 생각하면서.  

다음 날 아침, 과연 날씨는 어떨까 하며 문을 열었더니 햇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제 비가 내린 후라 공기는 더 깨끗하고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청명하고 예쁘다. 어제의 우중충했던 골목 계단길마저 예쁘게 보이는 날이다.

가볍게 차를 한잔 마시고,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으로 가는 길을 검색한다. 버스로 가도 30분, 도보로도 30분. 오늘처럼 좋은 날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숙소의 계단길을 내려와 보니 어디선가 기분 좋은 빵 냄새가 난다.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빵집이 있었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빵을 사 주변의 카페에서 커피를 사고 외부 자리에 앉아 간단하게 식사를 한다.

아직은 어제의 구름이 걷히지 않아 하늘에는 구름도 일부 남아있었다. 그러나 점점 구름은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하늘은 점점 더 푸르고 깨끗하게 바뀌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주노네(헤라) 신전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이 시내로 오는 길이 더 가까운 데다가 차들이 덜 다니는 길이고, 무엇보다 신전의 계곡을 바라보며 이동할 수 있다. 하늘은 파랗고 들판 역시 초록빛 풀들이 반짝거렸으며, 이름 모를 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이곳을 겨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날은 충분히 따뜻했고 불어오는 바람마저 산들거리며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주노네(헤라) 신전은 신전의 계곡 동쪽,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완전한 모양은 아니라도 신전의 기둥은 그 외양을 상상해 볼 수 있을 만큼 당당하게 서 있었다. 주노네 신전을 시작으로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곳곳에 올리브 나무와 같은 유실수들이 서있다. 끊어진 성벽의 유적에 서면 멀리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주노네(헤라) 신전

주노네 신전에서 콘코르디아 신전으로 가는 길에 카페가 하나 있다. 신전 유적을 바라보며 잠깐 즐기는 평화로운 오전. 석류주스는 충분히 달달하고 시원했다. 카페에서 나오니 신전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 신전의 계곡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콘코르디아 신전이다. 유네스코 로고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라는 설도 있고, 이 콘코르디아 신전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콘코르디아 신전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신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콘코르디아 신전이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전이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토와는 달리 아그리젠토의 신전 유적은 대부분 황톳빛 기둥이다. 대리석이 나지 않는 곳이기에 이곳의 가장 흔한 재료인 석회암으로 신전을 만들고, 그 위에 점토를 붙여 화려하게 채색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화려한 채색 점토가 시간의 흐름을 이겨낼 수는 없는 것. 그래서 오히려 신전의 계곡은 황톳빛의 고풍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콘코르디아 신전

콘코르디아 신전을 더 유명하게 한 것은 신전 앞에 놓인 거대한 청동 조각상이다. 폴란드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의 <이카루스의 추락(2011)>이다. 크레타 미노스 왕에 의해 유폐되었던 조각가 다이달로스가 새의 깃털을 모아, 큰 깃털은 실로 잡아매고 작은 깃털은 밀랍으로 붙여 날개를 만들어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날아서 탈출한 신화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 신기한 탈출과 하늘을 나는 즐거움이 소년의 마음을 들뜨게 한 것일까. 중간을 유지하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소년은 하늘 더 높이 올라가게 되고, 그리하여 작은 깃털을 붙인 밀랍이 태양빛에 녹아 결국 소년이 바다로 추락한다. 그 추락한 바다는 그리스 근처의 바다였는데 이후 그 바다는 이카리아 해라고 불렸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도 어쩔 수 없었던 그는 계속 날아서 시칠리아로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다이달로스가 도착한 이곳에 추락한 이카루스를 되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조각가는 이곳에서 전시가 끝난 이후 이 작품을 아그리젠토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의 영역인 콘코르디아 신전에, 신화의 영역에서 날아온 현대적 이카루스의 절묘한 결합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칠리아 아그리젠토의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이고르 미토라이의 <이카루스의 추락(2011)>

콘코르디아 신전을 지나 내려오면 8개의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유적이 보인다. 이것은 헤라클레스 신전이며, 지진으로 다 무너진 것을 영국의 고고학자 하드캐슬 경이 복원했다고 한다. 남아있는 유적만으로 신전의 전체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푸른 하늘 아래의 기둥은 그 자체가 신비롭게 느껴진다.

헤라클레스 신전을 내려와 무너진 유적들을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오래된 옛이야기를 가득 숨기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햇살 따스한 봄날 같은 아그리젠토의 오늘은 정말 천국 같다. 유적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커다란 사람의 형상이 복원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우스 신전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팔을 어깨 위로 올려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모양이다.

제우스 신전은 무너진 돌무더기들이 쌓여있거나 터만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실제 어떤 모습이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신전을 받치는 기둥이 이렇게 커다랗다면 신전 자체도 무척이나 웅장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 최고 신의 신전이니 당연히 장엄한 분위기의 거대하고 화려한 신전이었지 않을까.

제우스 신전 유적

제우스 신전에서 아래쪽으로 멀리 보이는 네 개의 기둥이 있는 신전은 아그리젠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이다.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백조로 변한 제우스가 스파르타 왕비 레다를 취하여 낳은 쌍둥이이다. 카스토르가 부상으로 죽게 되자 폴룩스는 아버지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둘이 함께 지하세계와 올림푸스에 반반씩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제우스는 그 둘을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었으며 그 별자리가 쌍둥이자리이다. 이들은 제우스의 아들들이라는 의미의 '디오스쿠로이'라 불렸으며 로마 기사단의 수호자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뒤로는 계곡이 이어진다. 계곡에도 여전히 유적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사람들이 작업하는 모습이 보인다. 주노네 신전부터 여기까지 완만하게 내려왔는데, 아그리젠토 시내로 돌아가는 방법은 왔던 길로 천천히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이대로 아래쪽 출입구로 나가거나 하는 방법이 있다. 단, 아래쪽 출입구의 경우 재미없는 찻길이라 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 동행들과 나는 버스를 타고 아그리젠토 시내로 귀환했다. 점심시간을 조금 비껴간 시간, 구글 맛집으로 소개된 내장 버거 가게로 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장 버거 이외에도 괜찮은 버거류들이 있어서 나처럼 냄새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도 적절한 곳이었다.  버거와 모레띠 맥주의 조합은 아주 좋았다.

식사를 끝내고 나와 아그리젠토 시내를 산책했다. 어제는 비가 내려서 미처 다녀보지 못한 아그리젠토 시내가 그 고풍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칠리아 곳곳에서 보아왔던 트리나크리아가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기념품 가게, 좁고 다정한 골목길, 고풍스러운 성당까지, 아그리젠토는 작지만 산책이 즐거운 곳이다.

이제 조금씩 햇빛이 길어지고 있다. 해질 무렵이 되어가나 보다. 서쪽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내일 날씨가 다시 안 좋아지려나. 일정이 좀 더 길고 차가 있었다면 근교의 스칼라 데이 투르키(Scala dei Turchi), '터키인의 계단'이라 불리는 하얀 절벽에 다녀올 수 있었을 텐데, 겨울에는 그리로 가는 대중교통이 없을 뿐인 데다가 내일은 다시 새로운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 아쉽지만 아그리젠토에선 '신전의 계곡'을 멋지게 즐긴 것으로 정리해야겠다. 저녁해가 부드럽게 이 도시를 비추고 있다.

시칠리아에서의 세 번째 도시, 그리스를 가득 품은 아그리젠토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컵라면을 먹었다면, 마지막 날은 돼지고기와 가지, 펜넬 뿌리와 양파를 구운 멋진 저녁으로 마무리한다. 과일과 고소한 리코타 치즈도 함께. 함께 한 동행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날 시라쿠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가는 중에 카타니아 공항행 버스를 보았다. 아그리젠토에서 시라쿠사로 가는 버스는 모두 카타니아 공항을 거치기 때문에 이 버스를 타는 게 좋다. 그러나 기사에게 물어보니 티켓부스에서 티켓을 구입해야 탈 수 있다고. 현금은 안 받는다 하여, 이 버스는 그대로 보내고 버스터미널로 와 티켓 부스에서 티켓을 구입한 후 남은 시간은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잔. 아그리젠토에 도착한 날과 마찬가지로 비가 살짝 흩뿌리고 있었다. '날씨 요정'까지는 아니지만, 내 여행의 경우엔 이동할 때만 주로 비가 오는 편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안녕, 아그리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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