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사는 머무르고 싶은 도시이다. 오르티지아 섬은 매일 같은 길을 돌아다녀도 신비롭고, 바다는 매일 쳐다봐도 지루하지 않다. 이번 시라쿠사 여행에서 내가 놓친 것은 시라쿠사에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지였다. 시라쿠사 고고학 유적지에 들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다. 그러나 여행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아쉬운 것을 하나 둘은 남겨두어야 다음번에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내게 있어 로마가 늘 그랬다. 로마 시내만 네 번 이상을 다녔는데도, 그래서 웬만한 관광객들이 가는 관광지는 거의 다 들렀고 그래서 근교 도시로 떠나도 되는데도 로마에 가면 다른 곳은 가지 않고 그냥 로마에만 머물게 된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 그런 로마처럼, 시라쿠사는 내게 그런 도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 달 이상 살아보고 싶은 곳. 오래되고 낡았지만 그러나 매력적인, 지중해를 품은 따뜻한 도시 시라쿠사. 어제 그렇게 시내에서 시간을 즐겼음에도 오늘 다시 시라쿠사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숙소 근처의 작은 서점은 이탈리아 서적과 약간의 영어 서적, 기념품을 소장한 작고 예쁜 곳이었다. 이곳에서 시칠리아를 선인장으로 표현한 에코백이 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어떤 것보다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들고 다니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서점을 나와 근처 카페에서 브리오슈와 아란치노에 커피 한잔으로 아침 시간을 잠깐 보냈다. 이탈리아에선 웬만해서는 커피는 실패하지 않는다. 이곳의 커피도 딱 좋았다.
카페를 나와 숙소에서 소개해 준 생면 파스타 가게 파리(Fari)로 가 보았는데, 이곳은 파스타 재료와 파스타 요리를 같이 판매하는 곳이다. 점심 식사부터 요리가 제공되기 때문에 점심때 다시 오기로 하고 오르티지아 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우리에겐 이른 시간이 아닌 오전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조금 이른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아직 문이 닫힌 가게들이 많았고 그래서 오르티지아 섬 골목길을 무심히 걸어 다녀보는 것도 괜찮은 휴식이었다. 어느 골목의 끝은 집으로 막혀있었는데,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리네 마당과 같은 중앙 정원이 포근하다.
오르티지아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파스타 가게의 식사 판매 시간이 되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가게로 가 보니, 어느 신사 한분이 식사 중이었다. 주문을 위해 자리에 앉았더니 서빙하던 직원이 어디에서 온 사람이냐고 물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선뜻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 준다. 이곳에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긴 오나 보다. 아니면 직원이 젊은 사람이라 한국에 관심이 있었을지도. 조용조용히 주문을 받은 직원이 뒤쪽에 있는 두 사람에게 주문 내역을 말하니, 바로 준비된 반죽으로 각각의 면을 뽑고 면을 빚는다. 생면 파스타 전문점이라 그런 모양이다. 주문을 받은 직원을 계속해서 판매할 면을 빚어 준비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조용히 파스타 요리에 집중했다. 일반적인 가정집에서 요리하듯 그렇게 마법을 부리더니 우리 앞에 각자의 파스타를 내놓았다.
기존 음식점에서 맛보던 파스타보다는 담백한 편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기본 반찬처럼 무엇인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문화가 아니니 그것까지 기대하지는 말자고. 화이트 와인과 곁들인 이곳의 파스타는 아마 이탈리아 가정식 파스타는 이렇게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종류별 파스타 면을 판매하기 때문에 이 거리의 많은 이들이 파스타 면을 사러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일반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파스타였다. 식사를 마치고 멀지 않은 곳에서 에스프레소 한잔. 이곳은 간판이 없지만 구글 평점이 좋은 카페다. 에스프레소와 함께 나오는 한 조각의 초콜릿은 커피의 맛을 훨씬 풍부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고 다시 오르티지아 섬으로 들어와 대성당 광장으로 간다. 골목길마다 시칠리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들과 작품들이 걸려있어서 걸어 다니는 재미가 한층 더해진다.
골목의 끝에 대리석 바닥이 아름답게 깔린 대성당 광장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햇빛은 구름에 가려져 있어서 광장의 찬란하고 밝은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다른 어느 광장보다 시라쿠사 대성당 광장은 색다르고 세련된 곳이다.
일행들과 헤어져 오늘은 시라쿠사 벨로모 주립 미술관에 들르기로 했다. 이곳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수태고지>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규모는 작지만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수태고지>는 팔레르모 버전과는 달리 수태고지의 도상을 두루 갖추고 있는 작품이지만 아래쪽의 훼손이 조금 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부분의 색채, 성모와 천사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이 작품을 보고 나오면 바로 이어지는 전시공간에 <수태고지>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그림들을 만날 수 있어서 그 역시 흥미로웠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들은, 아마도 읽지 못하는 군중으로 하여금 성경을 읽어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세이렌을 표현한 대리석 부조, 시라쿠사 성녀 루치아의 순교를 표현한 그림들을 찬찬히, 그리고 마음껏 홀로 즐길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던 미술관 산책. 함께하는 시간도 좋지만, 자신만의 시간에 침잠하는 것도 여행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미술관을 나와 아레투사의 샘에 다시 들렀다. 거의 매일 아레투사의 샘에 왔다 가는 단조로운 반복이었지만 한 번도 지겨운 적이 없었다. 매번 똑같은 아레투사의 샘이었지만 내게는 매번 다른 느낌이었다.
아레투사의 샘을 뒤로하고 다시 작은 골목길을 따라 대성당 광장으로 나왔다. 늦은 오후의 대성당 광장에서는 이제 저녁 장사를 준비하려는 노천카페 직원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 광장을 가로질러 골목길을 지나가면 첫날 만났었던 아르테미스의 분수에 도착한다. 분수 중심에 서 있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서 있고 그 주변으로 각각의 조각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이 작은 광장은 부근은 시라쿠사의 쇼핑 거리이기도 하다.
거리를 천천히 내려오는데 일행들이 보데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자신들도 이제 왔으니 천천히 오라는 문자였다. 파스타 이후 따로 무엇인가를 먹은 것은 아니어서 조금 출출할 때가 되었다. 천천히 걸어서 보데리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은 주문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샌드위치의 속재료가 풍성하다. 내일이 휴일이라 이곳에서도 거의 장사 마지막으로 만드는 것인지 재료를 풍성하게 넣은 샌드위치가 엄청나다. 샌드위치와 함께 이곳의 카놀리 2개를 샀다. 다른 곳보다 작고 덜 달아서 여기 카놀로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게 또다시 시라쿠사의 먹방을 찍으며 오늘 하루를 보냈다. 내일은, 일행 중 한 사람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라구사 여행에 다시 도전한다. 이번엔 기차가 제때 떠나기를, 그리고 날씨가 좋아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