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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May 23. 2024

어느 날 문득, 시칠리아-여덟

유레카, 아르키메데스! 유레카, 시라쿠사!

비가 흩뿌려지는 아그리젠토를 뒤로하고 카타니아 공항행 버스를 탔다. 이층 버스의 이층 제일 앞자리에 탄 것은 행운이었다. 마치 롤러코스터의 제일 앞에 탄 것처럼 시칠리아의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며 카타니아 공항 쪽으로 간다. 버스 여행을 하는 내내 날씨는 흐렸다. 지중해의 겨울은 여행 다니기에 그리 좋지는 않다. 물론 어제의 아그리젠토처럼 천국 같은 날씨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윽고 버스가 카타니아 공항으로 들어선다. 보통 카타니아 공항에서는 에트나 화산이 보이기 마련인데 오늘은 날이 흐려서인지 에트나 화산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  그래도 다음번 여행지인 카타니아를 여행할 때는 에트나 화산이 마법처럼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공항 2층 출국장에서 모든 승객들이 내렸다. 우리도 하차하여 공항 1층으로 내려가 시라쿠사행 버스 센터를 찾았다  카타니아 공항 입국장을 내려와 1층 오른쪽 입구로 나오면 조그마한 버스티켓 부스가 보인다. 이곳에서 인터시티 버스를 타고 시라쿠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버스 출발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잠시 카타니아 공항을 둘러보았다. 로마로 돌아갈 때 돌아와야 할 이곳. 그때는 아마도 시칠리아를 떠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것만 같다.

타니아 공항에서 약 한 시간쯤 걸려 도착한 시라쿠사는 흐린 날씨였다. 숙소는 버스터미널과 오르티지아 섬의 중간쯤에 위치한 아파트였고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짐을 이동시키기에는 딱 적절하고 좋았다. 꼭대기에 위치한 숙소는 다락방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부엌 뒷문으로 나가면 작은 옥상이 있어서 날씨가 좋을 때는 이곳에서 바비큐 파티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겨울이라 싸늘하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해서 바비큐건 뭐건 하기는 어려웠지만.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오르티지아 섬 쪽으로 잠깐 산책을 나갔다.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의 도시이다. 그리스 철학자이며 수학자, 물리학자이자 공학자인 아르키메데스는 시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대(大) 그리스)의 한 도시였던 이곳 시라쿠사 출신이다. 기원전 212년 로마에 항복하기 전까지 3년간 버틴 시라쿠사 저력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 전쟁에서 그가 사망했다.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하고 정리한 원리들과 발명품들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오르티지아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다리 앞에, 지중해를 바라보고 청동 거울과 컴퍼스를 들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서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의 발치에는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가 외친 말인 '유레카(EUREKA)'가 새겨져 있다.

오르티지아 섬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시라쿠사 구시가지로, 오래된 아폴론 신전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아폴론 신전을 정면으로 보고 왼쪽으로 올라가서 길을 꺾으면 아침에 열리는 시장으로 갈 수 있고, 오른쪽 바로 옆 큰길로 가면 아르테미스(다이아나)의 분수로 갈 수 있다. 아르테미스의 분수에서 난 길을 따라 시라쿠사 대성당,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아레투사의 샘까지 걸어갈 수 있는 이 오르티지아 섬은 작은 섬이지만 볼거리가 쏠쏠하다. 그런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때늦은 점심도 먹어야 하기에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밖에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실내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 되니까.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시라쿠사의 첫 오후를 즐겨보기로 한다. 아페롤 스프리츠와 모레띠 맥주, 시라쿠사의 파스타 알라 노르마, 피스타치오 파스타, 그리고 홍합을 넣은 봉골레 파스타를 시켰다. 식사 이후에 나온 리몬첼로와 레몬색 디저트는 기분 좋은 단맛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이제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비는 여전히 조금씩은 내리고 있었고, 아르테미스 분수 쪽으로 걸어가며 비 오는 오르티지아를 산책한다. 대성당 방향으로 가는 길이 조금 헷갈리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모든 길은 대성당 방향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에 곧 길을 찾았다. 시라쿠사 대성당 광장은 하얀색 대리석이 깔려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대리석 산지도 아니면서 성당 앞을 대리석으로 장식한 것은 이 도시가 과거에 그만큼 부유하고 강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비가 오는 광장도 운치 있는데, 햇살을 가득 받은 밝고 환한 광장은 또 어떤 느낌일지. 비는 그치지 않았고 조금씩 계속 내리고 있다.

숙소로 돌아왔다. 짐을 대략 풀고 웬만큼 정리가 끝난 후 가볍게 돈나푸가타의 화이트 와인 안씰리아를 마시며 오늘 하루를 정리해 보기. 비는 오지만 그리 춥거나 싸늘하지는 않은 시라쿠사가 마음에 든다.

시라쿠사의 이튿날은 약간 흐린 아침으로 시작했다. 일찍 일어났기에 동행 한 명과 함께 오르티지아 섬으로의 아침 산책에 나섰다. 1월의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시내는 아직 고요하다. 아폴론 신전을 바라보고 왼쪽길로 들어서서 섬을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아직 시장은 준비 중인지 고요하다.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니 타일로 예쁘게 원주율(π)을 장식한 집이 있었다. 역시 아르키메데스의 도시답게, 그가 정리한 원주율을 저렇게 집 바깥쪽 벽에다 장식했다.

바다 쪽으로 나오니 이미 솟은 해가 구름에 살짝 가려져 있고 그 아래로 햇살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아침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했고, 공기는 기분 좋은 서늘함을 품고 있었으며, 바닷바람은 평온했다.

오르티지아 섬을 한 바퀴 도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걷다 보니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면서 바다 바로 옆, 작은 연못이 철 난간 아래로 나타났다. 아레투사의 샘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강의 신 알페이오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님프 아레투사에 반하여 구애하지만, 아레투사는 이를 거절한다. 힘으로 그녀를 범하려 했던 알페이오스를 피해 아레투사는 엘리스 지방까지 도망가지만 강의 신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레투사는 그녀가 섬기고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도움을 청했고, 여신은 그녀를 구름으로 감싸 보호하였다. 구름 속에서 아레투사는 점점 물로 변하여 샘이 되었는데, 이를 눈치챈 알페이오스는 자신의 물과 아레투사의 샘을 결합하고자 하였다. 이에 여신은 땅을 갈라 아레투사가 그 사이로 스며들게 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녀는 지하세계를 통과하여 시칠리아의 이곳 시라쿠사에서 솟아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지하세계를 지나오면서 아레투사는 저승의 여왕이 된 페르세포네를 만나게 되었고, 후에 이를 딸을 잃은 것에 분노하여 땅에 저주를 내린 여신 데메테르에게 알렸으며, 그리하여 황폐해져 가는 시라쿠사의 들판을 구해냈다고 한다. 아레투사의 샘은 처음 보면 그냥 예쁜 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그랗고 맑은 샘 안에 파피루스가 예쁘게 솟아있고, 물오리들이 왔다 갔다 하는 맑은 샘. 그런데 바로 옆은 바다다. 그 바다 옆에 이렇게 맑은 샘이, 그것도 민물인 맑은 샘이 솟아오르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다.

오르티지아 섬을 그렇게 한 바퀴 돌고 가볍게 커피 한잔을 마신다. 섬이 워낙 작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라쿠사는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도시였다. 물론 이곳에서 살다 보면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숙소로 돌아와서 오늘 찾아가기로 한 라구사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 본다. 사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라구사를 굳이 넣을 생각은 없었다. 시라쿠사에 더 매력을 느꼈던 탓이기도 하고. 그런데 다녀온 사람들이 추천을 한 장소이기도 하고, 또 동행 중 한 사람이 꼭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해서 라구사를 목적지로 택했다. 라구사로 가는 방법은 버스, 기차, 또는 렌터카이다. 그런데 마지막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될 수 없는 것이라 제외. 전날 시라쿠사로 올 때 이미 버스를 타서 이번엔 시칠리아에서 트랜이탈리아 기차를 타보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우리는 시라쿠사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라쿠사 기차역은 전날 버스 내린 곳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시라쿠사 기차역에서는 본토로 들어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편이어서 기차역이 꽤 큰 편이다. 라구사로 가는 기차 티켓을 구입하고 플랫폼으로 나가니 오래된 두 량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이 기차가 과연 움직이는 것이긴 할까 하는 의구심을 담은 채 기차를 탔다. 출발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갑자기 역무원과 경찰들이 함께 들어서더니 여권 검사를 한다. 기차 안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검사를 하고도 몇십 분이 흘렀는데 기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도 조금 후에, 갑자기 시끄러운 트랜이탈리아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 방송이 끝나자마자 나오는 영어 방송은 오늘 이 기차의 운행 중지였다. 기차를 기다리고 착석하여 기다린 시간까지 거의 한 시간 반은 흘렀고 오전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카타니아로 가서 라구사행 버스를 갈아타기엔 시간이 조금 아깝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라구사 일정을 취소하고 시라쿠사에서 오후를 보내기로 했다.

오전에 잠시 산책한 것처럼 오르티지아를 향해 걸어갔다. 오르티지아 섬 입구, 다리를 건너기 전에 서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동상. 어제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르키메데스는 근엄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 쓰인 '유레카(EUREKA)' 글씨가 멋스럽다.

오르티지아 섬으로 들어가, 아침에 돌았던 것처럼 시장을 통과하여 시계방향으로 돌아본다. 이미 아침에 지나간 풍경이었어도 느낌은 새로웠다. 마주한 시칠리아의 겨울 바다는 구름이 가득하여 오히려 극적으로 보인다. 이런 겨울 바다에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에겐 이 날씨가 그리 춥지는 않나 보다. 우리는 바다가 가까이 보이는 곳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 여유롭게 즐기는 함께이지만 각자인 시간은 너무나 소중했다.

섬을 돌아서 도착한 신비의 샘 아레투사. 몇 번을 보아도 이 샘이 지겨워질 것 같지는 않다. 푸른 파피루스와 야자수, 그곳을 헤엄치는 물오리 떼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아레투사의 옆으로는 크고 넓은 광장이 있고 광장 끝은 바다를 바라볼 있는 전망대이다. 서쪽으로 해가지는 모습을 어쩌면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있는 곳일 것이다. 그곳 의자에 앉아 오래오래 바다를 바라본다. 일정의 변화가 생긴 여유로움이 하루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아레투사의 샘을 등지고 정면으로 난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바로 시라쿠사 대성당과 연결되는 곳이었다. 이 골목을 걷는 동안 독특한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이 지역의 화가 다닐로 리차르디(Danil Ricciardi)씨의 작품이었다. 세밀하게 묘사된 작품 포스터를 보고 있었는데, 실내에 있던 화가와 그의 아버지가 기꺼이 아틀리에 구경을 시켜주셨다. 멋진 그림이었다.

화가의 아틀리에를 나와 조금 걸으면 바로 시라쿠사 대성당의 광장이 나타난다. 하얀 대리석이 깔린 이 광장은 시라쿠사의 다른 어떤 장면보다 극적이다. 작고 오래된 골목의 끝에 나타난 흰 대리석의 광장. 영화는 못 봤지만 <말레나(2000)>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대리석 광장,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대리석이 깔린 광장은 환하다. 오늘은 구름이 가득하여 덜하지만, 여름이면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아마도 이곳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대성당에 들어가기 전,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광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성당이 산타 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연 새로운 미켈란젤로'라 불린 화가 카라바조(본명: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성 루치아의 매장(1608)>을 소장하고 있다. 로마에서 살인을 하고 도망을 다녔지만, 그의 재능을 귀하게 여긴 후원자들이 있어서 그림을 그려주며 시칠리아를 통해 몰타까지 건너갔던 시대의 풍운아 카라바조. 그가 아마도 시칠리아에 머물 때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은 시라쿠사의 수호 성녀 루치아의 장례식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성당 내부에 그 작품이 없었다. 단지 모사화와 현대적 해석 작품이 놓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복원 작업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성당을 나와 이번에는 광장의 주인공인 사라쿠사 대성당으로 들어간다. 주현절이 지났지만 아직 치워지지 않은 은색의 나선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서있는 옆의 기둥 사이에 성당 출입구가 있다. 시라쿠사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성당이지만, 원래 이 성당이 세워져 있던 자리는 아테네 여신의 신전이었던 곳으로, 성당 내부의 바깥쪽에는 우아한 코린트식 신전 기둥이 세워져 있고 내부에 다시 성당 벽과 기둥이 자리했다. 성모 마리아와 성 루치아노, 그리고 시라쿠사의 수호 성녀인 루치아를 모시고 있는 이 성당에는 성녀 루치아의 유골이 보존되어있다고 한다. 성당 내부는 화려하다기보다는 간결하고 우아한 느낌이다. 시칠리아에서 만난 성당들이 다 그러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대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늦은 점심시간이다.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즐기는 동행이 이곳의 샌드위치가 유명하다고 하며 그리로 이끌었다. 구글 맛집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은 이 가게 이름은 보데리(Boderi)로 아침 시장의 끝자락에 있는, 식료품 가게이면서 샌드위치를 판매하는 곳이다. 커다란 샌드위치 하나와 모둠 치즈와 햄이 있는 플레이트, 메시나 맥주를 시켰다. 샌드위치를 주문할 때 직접 가서 넣을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샌드위치는 나눠먹을 수 있도록 잘라서 나왔으며, 플레이트도 풍성했고 여기에 메시나 맥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풍성한 식사로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오늘 아침의 라구사행 기차 취소 사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시라쿠사의 이튿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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