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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May 31. 2024

어느 날 문득, 시칠리아-열

아는 만큼 보여 아쉬웠던 라구사. 그리고 차오, 시라쿠사. 아리베데르치.

원래 시라쿠사는 3박 일정이었으나, 카타니아 일정을 하루 줄이고 시라쿠사 일정을 늘여 라구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사실 나는 라구사에 그리 큰 관심은 없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열심히 조사했던 내용에서도 라구사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탓이다. 이번 시칠리아 여행에서 가장 덜 조사한 곳이 트라파니와 라구사였다. 동행 중 한 사람이 그곳에 꼭 같이 가보고 싶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미 다녀온 사람들도 많이 추천하는 곳이라 가보기로 했다. 이미 시라쿠사 도착 다음 날 라구사에 가려고 했었으나 기차가 취소되는 바람에 라구사 여행은 불발되었었다. 그리고 오늘, 라구사로 다시 가보기로 했다.

라구사 여행을 계획하고 기차표 예매를 했는데 가장 빠른 기차가 두 시간 뒤에 있었다. 그래서 매일 그랬던 것처럼 오르티지아 섬 산책에 나섰다. 오늘은 시라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씨를 만났다. 파란 하늘 아래 시라쿠사는, 우중충한 구름 아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르티지아 섬 입구의 아르키메데스도 훨씬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오르티지아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바로 오른쪽으로 꺾었다. 아레투사의 샘으로 바로 가는 길이다. 건물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길로 곧장 걸어간다. 문득 눈을  들었다가 전선줄 위를 걸어가는 비둘기 두 마리를 보았다. 날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두 비둘기는 마치 서로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아장아장 전선 위를 걷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길 끝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정면에는 배가 정박한 모습이 보였다. 가로수가  잘 정리되어 있었는데, 마치 가로수 사이의 그늘 아래로 하늘과 바다, 배가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왼쪽의 포르타 마리나를 지나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아레투사의 샘 옆에 있는 광장에 도착한다. 오늘 아침의 하늘과 바다는 너무나 푸르고 아름다워서 순간 꼭 라구사에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은 라구사에 가기로 했으니 그쪽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레투사의 샘에서 다시 발걸음을 돌려 기차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었던 작은 카페에서 브리오슈 하나와 커피를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기차역에 도착했다. 이틀 전과 같이 작은 두 량짜리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저 기차가 출발할까? 의심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그래도 일단 기차를 탔다. 다행히 승무원과 다른 승객들이 오르고 조금 후 이 장난감 같은 기차가 천천히 움직인다. 아, 오늘은 라구사에 갈 수 있는 모양이다.  

느린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선사하는 풍경은 마치 봄날 같았다. 하얀 꽃이 가득 핀 들판, 구름이 내려앉았지만 드문드문 푸른빛을 보이는 하늘, 그리고 따스한 날씨.

어느덧 기차가 라구사 역에 도착했다. 맑았던 시라쿠사의 날씨와 달리 라구사는 흐렸고 토요일이라 한산했다. 라구사 기차역 앞의 거울 조형물이 독특하다.

라구사 이블라 방향으로 표시된 표지판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아무래도 산속이라 구름이 가득한 날씨는 해안가의 시라쿠사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길을 따라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 그리고 한산한 거리. 토요일 정오쯤의 라구사는 말 그대로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 주말의 이 시간은 모든 이들이 쉬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보이는 성당 근처에 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해외에 나오면 늘 참고하게 되는 구글 평점을 따라간 식당에 손님은 아직 우리밖에 없었다. 깔끔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커피에 카놀로까지 먹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라구사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라구사 이블라 지역까지 제대로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마도 동행이 원했을 라구사 사람들의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그리고 라구사에 대해 그다지 깊이 있게 읽어보지도, 제대로 사진을 보지도 않고 이곳으로 온 것이 조금 아쉬웠다. 어쩌면 나는 라구사에 그다지 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찬찬히 살펴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구사 이블라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못하고 그 언저리 어디에서만 돌아다니다가 시라쿠사로 돌아오게 된 건지도. 물론 골목의 계단이 끝나는 지점까지라도 올라가 보자고 말은 했었지만, 라구사에 꼭 가보고 싶다 말한 동행은 사람들이 사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라구사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 듯했고 나 역시 이곳에 대한 매력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라구사는 아주 일부 모습만 살피고 돌아오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이번 라구사 여행의 교훈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에서 라구사는 다녀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텅 비어있고 스산한 도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차역으로 빨리 돌아와 가급적이면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자 했다. 그러나 기차는 15분 정도 지연되었는데, 출발한 이후 어느 지점에서 두 번인가 30분씩 연착되었다. 시칠리아 기차는 본토보다 더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우리가 시라쿠사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은 저녁이었다. 역내의 바에서 트랜이탈리아의 소소한 보상으로 스낵과 물을 받아 들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역시 시칠리아에선 차를 빌리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버스를 타는 것이 맞다. 숙소에 와서 시라쿠사의 마지막 밤을 조촐하게 보내고 각자의 짐을 꾸렸다. 내일은 시칠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카타니아로 떠날 테니까.

시라쿠사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시라쿠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청명한 날씨를 보여주고 있었다. 카타니아행 버스는 자주 있는 편이어서 우리는 오늘 버스를 조금 늦게 타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오르티지아 섬을 산책하기로 했다. 아르키메데스 상이 있는 다리의 건너편에서 어부가 열심히 그물의 고기를 빼내고 있었다. 아마도 시장에 내다 팔만한 고기와 그렇지 못한 것들을 가려내는 모양이었다.

아폴론 신전과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아르테미스의 분수-현지인들은 다이아나의 분수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나는 아르테미스의 분수가 더 익숙한 모양이다-앞을 돌아본다.

이곳에서 대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라쿠사에서 가장 멋있고 아름다웠던 곳은 바로 이 성당이니까. 성녀 루치아 조각상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대성당 광장은 햇살에 눈부시게 빛날 것으로 보인다.

대성당 광장 한쪽으로 난 작은 골목길을 지나 도착한 아레투사의 샘. 이 샘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 아레투사에서 커피 한잔 하며 아레투사의 샘과 바다를 오래오래 바라본다.

매일 보았던 이 풍경도 오늘이 마지막이고 이제 돌아가면 계속 그리워질 테지. 여행이란 그런 것이니까. 언젠가, 시라쿠사에 돌아와 한 달은 살아보고 싶다. 숙소로 돌아가 짐을 가지고 내려온다. 이제 시라쿠사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다. 그나마 맑은 날에 시라쿠사를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시라쿠사에 대한 예쁜 기억만을 담고 떠날 수 있으니까.

버스를 타고 시라쿠사를 벗어나며 만나게 되는 '눈물의 성모 마리아 성당(Basilica Santuario Madonna delle Lacrime)'은 그 뾰족한 지붕모양이 독특하다. 실제로 일정한 시기에 눈물을 흘린 성모 마리아상을 모신 성당이라고 한다. 여긴 시라쿠사에 다시 오면 가보는 것으로. 아쉬운 것을 하나 이상은 남겨두어야 다시 올 수 있는 이유가 되니까.

차오, 시라쿠사. 아리베데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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