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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Jun 04. 2024

어느 날 문득, 시칠리아-열하나

에트나 화산의 도시, 카타니아

시라쿠사를 출발한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멀리 흰 눈을 쓴 높은 산이 보인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인 에트나 화산이다. 오늘처럼 맑은 날에는 저렇게 깨끗하게 보여 신기할 정도다.

겨울이라 에트나 화산에 눈이 쌓여, 어쩌면 한라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에트나 화산은 검게 보이기에 그 독특한 모습을 자랑한다 할 수 있으니까. 에트나 화산이 가깝게 느껴질 무렵 카타니아 공항에 도착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내렸지만 우리는 카타니아 시내로 가는 것이니 그대로 앉아 있으면 되는 것. 버스는 공항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을 태우고 카타니아 시내로 간다. 가는 길 어디에서나 에트나 화산이 보인다. 마치 제주도 어디에서나 한라산을 보는 것처럼. 가는 내내 에트나 화산은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숙소로 가는 길, 살짝 배가 고프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가게가 있었는데 케이크 전문점인지 여러 종류의 케이크와 빵, 아란치니가 보였다. 숙소 체크 인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우리는 테라스 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평범한 길거리 카페였지만, 시라쿠사의 아기자기함과는 다르게 카타니아는 조금 크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숙소는 분명 3인실로 예약했는데 2인실 숙소가 배정되어 있었다. 복층 숙소로 아래층에 소파베드가 있고 위층에 더블 침대가 있어서 사실 3명이 충분히 쓸 수 있는 공간이었고, 단지 수건 수가 2인에 맞춰진 것밖에는 없었다. 그 외에 크게 문제가 없었기에 우리는 이 숙소에 짐을 풀고 잠깐 정리를 마친 후 카타니아 산책에 나섰다. 시라쿠사 일정을 늘이면서 카타니아 일정이 줄어들었고, 오늘 저녁 이외에는 카타니아를 돌아볼 일이 거의 없다. 내일은 에트나 화산으로 올라가 볼 예정이기 때문이다. 카타니아는 음악가 빈센초 벨리니의 고향이다. 그래서 이곳의 오페라 극장은 떼아뜨로 마시모 벨리니로 불린다. 오늘 이곳에서는 푸치니<투란도트>가 공연된다고 한다. 이따가 박스오피스가 열리면 표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지금 시간은 박스오피스도 닫혀있으니, 천천히 걸어서 시내 쪽으로 향했다. 주말인 데다가 오늘 날씨가 무척이나 좋아서 사람들이 거리마다 북적였다. 며칠 전의 고요하고 한적한 작은 마을 라구사와 달리, 카타니아는 기분 좋은 분위기가 가득한 도시였다. 이곳에서도 좀 더 길게 머물면 좋을 테지만, 일정상 그럴 수 없으니 지금을 즐기자.

카타니아 시내 중심으로 가기 전, 작은 광장에 분홍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아마도 아크릴로 만들어진 듯한 코끼리 상이 있다. 아이들이 이 코끼리 상을 만지며 즐겁게 놀고 있다. 이 고풍스러운 도시에 이렇게 생뚱맞은 색의 코끼리라니. 이 작은 코끼리 상은 두오모 광장에 있는 커다란 현무암 코끼리 상의 사본 정도 된다고.

화산 피해가 컸던 카타니아에 에트나 화산의 현무암으로 만든 코끼리 상을 만들어 세운 이후 화산 피해가 줄어들었다고 하니 영묘한 코끼리 상이었나 보다. 그래서 이 화려한 색채의 코끼리 상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광장은 두오모 광장이 있는 시내로 연결된다. 두오모 광장에는 카타니아의 수호 성녀 성 아가타를 모신 성당이다. 이곳에는 성녀 아가타의 묘가 있는데, 성녀의 무덤에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많은 이들이 꼭 아가타 성녀의 묘를 방문한다. 나 역시도 그들을 따라 방문하고 소원을 빌었다.

성당 맞은편에는 높은 단 위에 예의 그 검은 코끼리 상이 있고, 코끼리 위에는 커다란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 광장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아가타 성당과 함께 이 코끼리 상을 열심히 사진 찍고 있었다. 코끼리 상 옆으로 물소리가 가득하다. 분수가 보인다. 분수 아래로는 수로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분수는 이곳에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떼아뜨로 마시모 벨리니의 박스오피스가 열렸다. 아쉽게도 <투란도트>는 매진이었다. 내게도 이 공연이 기대되는 것이었던 것처럼, 카타니아 사람들에게도 그랬던 모양이다. 미리 예매했어야 했는데 아깝다. 다음번에는 꼭 이 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걸로. 팔레르모의 떼아뜨로 마시모와 카타니아의 떼아뜨로 마시모 벨리니. 꼭 다시 올 곳으로 추가되었다. 카티니아의 건물들은 좀 칙칙한 색이다. 아마 화산 근처에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팔레르모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비가 오면 무척이나 우울할 것 같은 색조의 도시이지만, 오늘은 햇살이 가득해서인지 사뭇 밝은 분위기가 도시를 가득 채운다.

큰길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가게가 있었다. 아란치니 가게이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고 회전율도 빠른 편이라 우리도 아란치노 하나를 샀다. 갓 튀겨낸 아란치노는 따끈하고 맛있었다.

숙소 근처에 평점이 좋은 맛집이 있어서 우리는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넉살 좋은 웨이터 아저씨의 농담을 들어가며 적절한 가격의 좋은 식사를 즐겁게 마쳤다. 역시 평점이 좋은 식당은 그 이유가 다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와인 한잔을 하며 내일 일정을 조정한다. 일행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밝고 따스한 카타니아를 더 즐기겠다 했고, 나와 또 다른 일행은 내일 에트나 화산 탐방을 나서기로 했다. 해발 2000미터까지 올라가는 버스를 타고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500미터 더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고 에트나 화산을 탐방해 보는 코스. 우리나라의 열혈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참고하니 어디에서 어떤 버스를 타면 되는지 너무나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그들만큼 열혈 관광객은 아니지만, 일단 내일 나와 동행 한 사람은 아침 일찍 버스를 타러 가기로 했다.

카타니아와 타오르미나를 끝으로 시칠리아 여행이 끝난다. 동행 중 한 사람은 카타니아에서 팔레르모로 떠나고, 한 동행은 나와 타오르미나 하루 여행을 끝낸 뒤 기차를 타고 시칠리아에서 로마로 떠난다. 셋이 함께하는 밤도 오늘과 내일 밤,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엔 서로에게 맞추느라 삐걱대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내 또래를 만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번에는 내가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다음 날 새벽부터 우리 두 사람이 부스럭대며 나갈 준비를 한다. 그리 일찍 나갈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정보를 접했기에 우리는 아주 이른, 이제 막 해가 뜨려고 하는 아직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버스 티켓 판매소에 도착했다. 카타니아의 1월 아침은 기분좋시작했다. 싸늘한 공기가 적당히 몸을 감쌌다. 표를 사고도 시간이 남아서 근처의 기차역에 있는 카페에서 카푸치노와 브리오슈를 간단히 먹었다.

시간이 되어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줄을 서니 우리 뒤쪽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있었다. 버스 기사님 뒤쪽 자리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에트나 화산행 버스 왕복표는 올라갔던 버스가 그대로 같은 관광객들을 태우고 내려온다. 그러니 내려오는 버스를 놓지만 상당히 난감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어제와 달리 하늘에는 구름이 조금 끼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구름은 조금 더해갔다. 눈이 내렸다 해도 도로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길은 잘 말라 있었다. 단지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운전을 했을 경우에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이어도 따뜻한 카타니아 시내와 달리, 에트나 화산이 가까워질수록 바깥공기는 차가워지고 곳곳에 눈이 보였다. 따스한 봄에서 갑자기 겨울왕국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해발 2000미터에 위치한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구름이 자욱하고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지난번 트라파니 케이블카 때와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보통 에트나 화산 케이블카는 웬만해서는 멈추지 않는다고 하는데... 오늘 불어오는 바람은 왠지 걱정될 정도다. 버스가 선 곳에서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야 한다.

이제까지 시칠리아에서 맞은 바람 중 가장 차갑고 가장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생각해 보니 이곳의 해발고도는 거의 한라산 꼭대기 수준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에트나 화산 케이블카는 꼭 타보고 싶었다. 그러나 왜 슬픈 예감은 또 틀린 적이 없는 것일까. 케이블카 티켓 판매소에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들어섰는데 티켓 부스 앞에 붙여진 Chiuso(Closed) 표지는 실망스럽다. 그래도 혹시 몰라 물어보니 바람이 너무 센 탓에 케이블카의 안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바람이 잦아들어야 오를지 말지 결정이 되는데, 아마도 오늘은 케이블카가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아이고야... 트라파니의 경우에는 걸어 오르면 되었지만, 이곳은 그럴 수는 없다. 물론 전문산악인 복장을 하고 오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기에. 버스는 오후나 되어야 내려갈 것이고, 일단 우리는 따뜻한 곳에서 커피나 마시며 수다 떨다가 무엇을 할 것인가 결정하기로 했다. 에트나가 우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허락한 곳까지에서 그대로 즐기면 되는 일이니.

시칠리아에서 따스한 봄날만 느끼다가 에트나 화산 중턱에 올라오니 그야말로 겨울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눈 위를 불어오는 바람 속에 약간의 따스함이 숨어있다. 우리나라 겨울바람처럼 그렇게 시리고 추운 바람은 아니다. 물론 거센 바람 속에 잠깐 손을 내놓고 있으면 손이 시릴 정도이긴 하지만, 얇은 오리털 패딩하나에 가을용 아노락 윈드브레이커를 입었을 뿐인데도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단, 장갑은 꼭 필요했다.

케이블카를 타지 못했기에 아래쪽을 둘러보다가 기생화산인듯한 곳을 보았다. 둥그렇게 서 있는 모습이 제주도의 오름을 보는 것 같았고, 왠지 그 기생화산은 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쪽으로 다가갔는데 사람들이 걸어가는 흔적이 거의 없었다. 보기에는 참 걷기 좋아 보이는 오름처럼 보이는데 왜 사람이 없을까. 그 이유가 있었다. 내가 순간 잊어버린 것이 이곳의 해발이 2000미터 정도 되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한라산 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는 기생 화산, 탁 트여 있는 그 화산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사람의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다. 오름처럼 생각하다니 나도 참 어이없다.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기생 화산 입구를 조금 걸으려다 몸도 못 가누고 돌아왔다. 에트나는 중턱이라도 무서운 곳이다.

그 기생 화산 입구의 기념품 가게로 들어와 몸을 녹이면서 에트나 화산 검은 모래를 붙인 예쁜 병을 보았다. 카타니아에 내려가도 살 수 있는 것이지만, 오후 늦게나 카타니아에 도착할 것이고 그래서 이곳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마음에 드는 작은 병을 샀다. 시칠리아에서 산 몇 안 되는 기념품 중 하나이다.

늦은 오후, 점심을 먹기 위해 푸드코트로 움직였다. 피자와 아란치노, 메시나 맥주를 곁들인 식사로 잠깐 쉬었다.

식사를 하고도 내려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서 다시 바람 부는 이곳을 산책한다. 아까 전의 그 분화구 쪽으로는 푸른 하늘이 드러나 있고 저 아래쪽 멀리 카타니아인지 타오르미나인지 도시가 보인다. 그런데 반대쪽에는 엄청난 구름이 낀 흐린 하늘이 마주하고 있어서 이게 대체 웬일인가 싶다.

버스가 내려갈 시간이 가까울 무렵 사람들이 하나둘씩 오전에 내렸던 버스 정류장으로 모여들었다. 변화무쌍하지만 살을 에는 추위는 아니었던 에트나 화산 중턱에서 이제 내려갈 준비를 한다. 버스 정류장 휴게소에서는 리몬첼로를 비롯한 가벼운 주류 무료시음이 있었다. 마셔보고 마음에 드는 것 주문하라는 것인지라, 가볍게 리몬첼로 한 모금 마셔보기. 버스가 도착했고 이번에도 아까처럼 기사님 뒤에 앉게 되었다. 산속 추위에 돌아다녀서인지 노곤해진다. 그리고 버스의 고도가 낮아질수록 따뜻한 느낌이 가득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에트나를 경험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겨울은 에트나를 방문하기에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여름 언젠가 검은 화산인 에트나를 만나러 다시 올 수 있기를.

카타니아 시내를 돌아다녔던 동행이 시장에서 싱싱한 생선을 사 왔다. 오늘은 셋이 함께 있는 마지막 밤이다. 음식점에 나가서 즐길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 먹기로 했다. 아직까지 남아있던 한국 음식 털어먹기도 하면서. 각기 다른 성향의 세 사람이 만나 삐걱대는 면도 많았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맞춰가며 여행을 하는 묘미도 오랜만에 느껴보아서 좋았다. 우리의 마지막 만찬도 이제까지처럼 멋졌다.

다음날 아침, 체크 아웃을 하고 우리는 모두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한 사람은 팔레르모로, 나와 다른 동행은 함께 타오르미나로 갔다가 그 동행은 오늘 밤 로마로 떠나는 기차를 타고, 나는 타오르미나에 이틀 머물 것이다. 이후에는 자신들이 각자 좋아하는 방식으로 여행하는 것. 그렇게 우리는 버스 터미널에서 서로 안녕을 고했다. Ci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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