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미나를 끝으로 시칠리아 여행을 끝냈다. 팔레르모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던 이 여행. 렌터카로 다녔으면 동선이 훨씬 자연스럽고 시간도 덜 들었을 텐데, 아직 해외에서 운전을 해보지 않았기에, 그리고 굳이 운전할 필요가 없었던 지역을 다녔기에 렌터카를 이용할 생각을 못했다.뚜벅이로 시칠리아 여행을 다닐 것 같으면 팔레르모와 카타니아를 중심으로 근교를 다녀오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다닐 때처럼 동선을 만들었던 것이 이곳에서는 조금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오랜만에 동행과 함께 다니는 여행. 주로 혼자 다니는 여행을 하다가 동행이 있는 여행을 했더니 조금 낯설었다. 이번에 함께 한 동행들은 모두 서로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다 같은 나이라 오히려 공감대가 형성되어 얘기도 잘 통했고 저녁에는 와인을 마시며 그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보낼 정도로 좋았다.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동행들이었다. 단지, 늘 혼자 다니던 여행 패턴이 조금 달라져서 낯설었던 것이고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문제이다. 그리고 입이 짧은 편인 내가 가리는 음식이 좀 많았다는 것도 이번에야 제대로 깨달았다. 동행들은 내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사실 외국에 나왔을 때 가장 익숙한 맛이 단맛인 탓이다. 지나치게 달더라도 커피와 함께 먹는다면 결국 익숙한 맛이 되니까. 고기 누린내, 생선 비린내에 민감한 편이라, 외국에 나오면 의도치 않게 반(半) 채식주의자가 된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이번 여행도 아쉬운 점은 많다. 시차적응 하느라 팔레르모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이 조금 아쉽다. 노르만 궁전을 방문하지 못한 것, 떼아뜨로 마시모에서 공연을 관람하지 못한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1월 첫 주에는 떼아뜨로 마시모의 공연이 없기도 했지만.
트라파니는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단지 에리체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간 곳이라 완전히 낯선 곳이었다. 여름에는 파비냐나 섬으로 가는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고, 트라파니의 염전은 소금의 질도 좋지만, 2000년이 넘는 염전의 역사로도 유명한 곳이라는 것, 그리고 근교의 마르살라는 포도주로 유명하다는 것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그리젠토는 교통의 오지였지만 너무나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 같은 곳이라는 것은 그리스에 다녀와봐야 알겠지만, 아그리젠토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떤 이들은 아그리젠토가 별 볼거리가 없다며 그냥 스쳐 지나가는 편이지만, 나는 아그리젠토의 그 분위기가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이번 시칠리아 여행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는 시라쿠사. 따뜻한 날씨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아름다운 대성당과 그 광장, 아레투사의 전설이 그대로 남아있는 아레투사의 샘까지. 라구사에 가느라 미처 들르지 못했던 고대 그리스 유적은, 다음번 시라쿠사 방문에서 꼭 가보는 걸로. 시라쿠사에서 첫 이틀간은 날씨가 그다지 좋지 못해서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라구사 방문 때문에 시라쿠사 일정을 늘이면서 카타니아 일정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카타니아를 돌아다닌 것은 반나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그 반나절의 날씨가 좋았고 게다가 토요일이어서 사람들도 많은 흥미로운 곳. 카타니아에서 가장 기대한 것은 에트나 산 등반이었는데, 산 중턱의 케이블카가 날씨로 인해 멈췄다는 것은 정말로 아쉬웠다. 검은 화산인 에트나는 흰 눈을 쓰고 있어서 멀리서 사진을 찍으면 한라산처럼 보이기에, 이번에 못 올라간 에트나에는 겨울이 아닌 어느 계절에 다시 와서 가보는 걸로.
타오르미나에서도 이솔라벨라로 내려가는 케이블카 수리 중이라 아랫마을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기차역이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가 이오니아 해를 마주하는 경험도 했어야 했는데, 여행의 막바지라 그럴 기운이 나지 않았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숙소에서 타오르미나 버스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카타니아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이제 막 해가 뜰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이보다 늦은 버스를 탈 수도 있었으나, 로마행 비행기를 타야 해서 좀 일찍 공항에 도착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버스를 타고나니 해가 뜨려는 듯 조금씩 주위가 밝아지고 있었다. 에트나 산을 왼쪽 옆에 두고 버스는 계속 달려서 카타니아 버스터미널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공항으로 간다. 그동안에도 에트나 산은 계속 옆에 있었다. 이윽고 공항에 도착. 이른 시간이라 아직 카운터가 열리지 않았다. 공항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는 동안 에트나 산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찍힌 사진을 보고 빵 터졌다. 꼭 서귀포 어느 지점에서 한라산을 찍은 것처럼 나왔던 탓이다.
이제 얼마 후면 이 풍경을 뒤로하고 로마로 떠난다.
이윽고 카운터가 열렸다. 수속을 마치고 짐을 부친 후 검색대를 통과하여 게이트 앞에서 기다렸다.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아에로이탈리아는 제시간에 이륙하여 시칠리아를 떠난다. 시칠리아를 떠나는 날인 오늘 날씨가 너무나 좋다.
비행기의 방향을 보니 에트나 화산 위를 지나갈 것 같다. 다행히 에트나 화산이 보이는 쪽 좌석이다. 저 앞으로 눈 덮인 에트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가깝게 지나갈 때쯤, 시칠리아와 에트나에 작별을 고한다.
차오. 아리베데르치, 미아 시칠리아(Ciao. Arrivederci, mia Sici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