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넝쿨 사이로 소슬 바람이 파고들면 기러기 소리 처량해지고 섬돌 및 귀뚜라미 가을을 노래할 때 나는 주기적으로 오는 계절 통이 있다. 온 산야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을 때면 단풍은 마지막 잎사귀를 헤아리고, 들판이 황량함으로 비워 갈 때쯤에 고해성사 같은 추억을 소환하여 그 시절의 망나니 친구들을 아스라한 기억으로 그들을 그려본다. 때론 회한으로, 가슴시린 그리움으로....
우리들 젊은 날의 초상은 가난이 낭만으로 포장되고, 언제나 영혼의 갈급함으로 부산을 떨어야 했고 육신의 허전한 시장 끼가 주머니 속에 가득 담겨 있었다. 시퍼런 호랑이의 눈 같은 감시의 불빛이 우리를 따라 다니던 시절. 마시고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절망을 안주삼아 밤을 밝히곤 했다. 술 먹다 돈이 모자라면 처음 간 가게라도 시계부터 외투까지 담보로 잡히고 그것도 부족하면 구두도 벗어주고 여자들 슬리퍼를 끌고 가다 불편하면 벗어 던져 버리고 맨발로 가기도 했다. 막걸리 집은 외상이 거래의 기본이 되며, 해를 넘기고도 헛웃음 한번으로 용서가 되는 푸근한 덕스러움의 풍토가 어떻게 자리 했는지 모르겠다.
한번은 친구 생일날 이었다.
여섯 명이 가위 바위 보로 그날의 식대를 책임질 주인공을 뽑아서 중국인 사장 집으로 향했다. 양장피에서부터 탕수육, 깐풍기, 유산슬, 삭스핀 까지 최고급으로 주문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죄악을 장난이란 이름으로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금전적, 심적 고통을 주었으니 참으로 용서 받지 못할 중죄이다. 배불리 먹은 화상들은 주인공만 남겨두고 모두 나가고 계산 하는 척 하던 그는 줄행낭을 쳤다. 뚱뚱한 중국인은 뒤를 쫒다가 길 위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 주인장의 처절한 심정을 그때 우리는 상상 이나 했을까? 그걸 자랑이라고 무용담까지 게거품을 물고 떠들었으니 참으로 한심 할 일이다. 늦게나마 그 집을 찾았으나 그들은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돌아갔단다.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을 용서 할 수 있을까? 그들을 떠나게 한 일등공신이 우리들이 아닐지 모르겠다. 언제나 오목가슴에 돌덩이가 막힌 듯, 그날의 넘어진 그 주인장의 모습이 떠올라 많은 날을 괴로워해야 했다.
그 시절은 가난이 공평하게 나누어졌고 어쩌다 한 두 집이 예외 이었기에 쌀 꾸러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보리 몇 주먹을 꾸기 위해 아침부터 박 바가지를 등 뒤에 감추고 고샅길을 달음질 쳐도 수치가 아니었고 못 꾸어 주어 미안해했던 시절 이었다.
마을에서는 서리라는 놀이 비슷한 절도가 관대하게 용인 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참외며 수박, 심지어 닭서리 까지도 있어 적당한 양의 도둑질은 묵인되는, 참의로 유교적 관용이 좋은 풍습이 되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서로 묵계된 양이 많아지면 가끔 지서에서 순경이 출동되기도 했다. 가령 수박이 열통쯤 되거나 닭을 한 번에 두 마리쯤 없어지면 분쟁의 소지가 됐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고, 피아간에 경계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잘 지켜서 나누어 먹곤 했다. 어떤 모자란 친구는 과수원 한편에 거름을 하기위해 길게 파놓은 분뇨 통에 목까지 빠져서 그 냄새가 석 달 열흘을 온 동네 에 퍼지고 똥독에 올라 고생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생기기도 했다.
학업을 위해 대처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만난 우리의 준태는 돈 잘 쓰는 멋쟁이였고, 백마 탄 왕자였다. 방과 후 준태의 뒤로 많은 친구들이 따랐다. 이유는 빵집이고 떡볶이, 자장면 까지 준태의 호주머니는 화수분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우리 모두는 준태의 가정환경을 무지막지한 부잣집으로 알고 있었다. 절대로 집에 초대한일이 없는 그가 어느 날 넌지시 집에 같이 가자고 내 팔을 이끌었다. 준태의 집은 기와집이 디귿 자로 된 고택이었다. 한 살림 했던 가문의 종손이라 했다. 6.25 때는 대표적 부르주아 계급으로 많은 고난을 당했다한다.
그는 고백했다. 자기 집은 그렇게 부유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종손이라 한 달에 두 번 정도 있는 제사며 시제를 모시기 때문에 종중에서 비용이 지원되고 쌀이며 기타 필요한 부식이 제공 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주 수입원은 족보를 팔아서 비용을 충당한다는 것이다. 용돈의 출처를 묻자 그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동안 용돈은 언제나 가득가득 채워놓은 뒤주에서 나왔다 한다. 손님의 출입이 잦은 종가집이라 쌀만큼은 언제나 풍족하게 채워 놓는단다. 곳간 열쇠를 할머니가 관리 할 때는 언제나 잠겨 있어 도저히 기회가 오질 않았단다. 관리권이 어머니에게로 넘어오자 틈이 보이기 시작했단다. 항상 바쁜 엄마는 쌀을 퍼가고 열쇠를 걸어두시곤 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준태의 지갑은 풍년을 구가했다. 책가방 양쪽에 가득 쌀을 채우면 여섯 되가 들어가는데 그것이 일주일 용돈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기를 일 년쯤 되었다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쌀을 담고 나오다 변소에 가시던 할아버지 에게 들키고 말았단다. 이때부터 준태의 보릿고개가 시작 되었단다. 할아버지는 공과금부터 모든 용돈도 삭감하고 일원 까지 따져서 옥죄어 왔으니 실로 지옥 같은 나날이었으리라.... 곳간의 관리권도 할머니에게로 넘어갔고 모든 가족의 감시의 눈초리는 일본 놈 순사보다 예리해졌단다.
그러나 준태가 어디 보통사람인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자금원이 될 것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방 한 칸에 가득 쌓인 제기에 눈이 갔다. 목기도 있고 놋쇠도 있어 상당한 수입원이 되었던 것이다. 놋대접하고 놋주발 한 쌍 이면 일주일 용돈이 충분했다. 워낙 많은데다 누가 검수도 안하고 모자라면 종중에서 채워주니 당분간은 발각되지 않음을 알았다. 입출입시 검문검색이 심해 직접 들고 가기는 어렵고 고물장사 아저씨를 저녁 즈음에 담밖에 대기시키고 던져주고 받아가는 수법으로 절도 행각을 했던 것이다. 나를 부른 것은 내일 할아버지가 종중일로 멀리 출타하니 작업을 할 것이니 와서 구경도 하고 망도 보라는 제의를 한 것이다. 다음날 마침 국경일이라 편한 마음으로 준태의 절도 현장에 공범으로 망을 보게 되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고 사발하나가 날라 온 것을 고물아저씨가 멋지게 받아서 챙기고 다음으로 넘어갈 즈음에 멀리서 할아버지가 급히 오며 “네이 도적놈들아! 꼼짝 마라!” 그 소리에 나는 혼비백산 줄 행낭을 치고 말았다. 돌아서는 그때에 담을 넘는 놋주발을 보았고 아이고 하는 비명을 듣고는 나는 멀리 달아나 있었다.
이틀 후 초죽음이 되어 나타난 준태의 사건 전말은 이랬다.
중요한 서류를 놓고 가신 할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시다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고 노발대발하신 할아버지는 경찰을 불러 고물상 아저씨하고 준태를 절도로 고발하게 되었고 둘이는 현행범으로 유치장에 가두었다. 준태 아버지가 무릎 꿇고 사정을 해서 놋주발에 맞아 갈비 두 대에 금이 간 고물상 아저씨를 용서하기로 하여 간신히 풀려 났다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할아버지는 준태 와 협상을 하게 되었다. 고정적 용돈을 주기로 하고 다시 한 번만 집안 물건을 손을 대면 형무소에 보내기로 서약서에 도장을 찍었단다.
이렇게 평화가 찾아온 준태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친척 한분이 미국에서 잠시 오시면서 미제 전기다리미를 선물하게 되었다. 그 시절 참으로 귀한 물건이었다. 오로지 주야로 준태의 목표는 다리미에 가있었다. 또한 집안에서도 빨래를 다리는 날은 초비상이 걸렸다.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할머니는 마루에서 보초를 서다가 준태가 나타나면 “준태 온다! 대리미 감춰라!” 구령과 함께 어머니는 뒷문으로 사라지곤 하셨단다. 끝내 다리미만큼은 구경도 못하고 말았다 한다. 먼 훗날 만난 준태의 얘기는 이러했다. “야 세상에 나 같은 프로가 그렇게 찾아도 없던 것이 뒤란에 있는 항아리 속에 있을 줄이야. 내가 지고 말았다.” 그리운 친구는 시골에서 모텔을 운영하며 잘 살고 있다. 혹시 지금도 방에 있는 헤어드라이기를 들고튀지는 않겠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