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국기술대학교 능력개발교육원에서 '신중년 교직훈련과정'을 이수하며 끄적였던 노트를 찾아냈다. 노트를 펴고는 시인인 줄 알았다. 첫 장에는 '노을'이 두 번째 장에는 제목 없이 끄적인 글이 있었다. (첫 장에 끄적였던 '노을'은 <신중년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 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무제
자욱한 안갯속을 헤치며 걷는 그 길 위에는
철컥철컥 기차소리만 울렸다
그 아이의 뒷모습은 쓸쓸했고,
백미러에 비친 쓸쓸한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여전히 생각나고,
여전히 잊기도 하고,
여전히 괜찮기도 하다
철컥철컥 기차소리가 들리고,
창밖엔 십자가가 걸려있다
20살 같은 난,
이 시간이 좋다
2020.07.18(土)
당시 신중년 교직훈련과정 집체교육을 한기대 제2캠퍼스(천안)에서 받았는데 여름에 수업을 들어 많은 날들이 폭우로 이어졌다. 주말 이틀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들었고, 내 자리는 언제나 창가 옆이었다. 자리를 정해 주지는 않았지만 서로협의한 듯 다들 첫 수업 시 앉은 자리에 마지막날까지 앉았다. 내 자리도 첫날 그 자리였고, 그 자리는 창가 옆이었다.
코로나 팬더믹이 한창이던 때라 환기를 이유로 창문을 계속 열어 놓았다. 열린 창문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기차소리를 계속 듣게 되었는데 나는 그 소리가 참 좋았다. 한기대 옆 기찻길을 따라가면 내가 다니던 대학교가 있고, 빗소리와 공명해 더욱 크게 들리는 기차소리는 나를 언제나 그 시절로 옮겨 놓았다.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수업을 안 들어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맞았던 내가 학원교사가 되어보겠다고 강의실에 앉아있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강의를 들으며 틈만 나면 딴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웃기기도 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그나마 수업을 들었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기차소리를 따라 대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스무 살. 참 이뻤던 시기. 참 아팠던 시기.
한기대 노트에도 스무 살로 돌아간 나와 신중년이 된 내가 혼재해 있었다. 스무 살의 나는 시인이었고, 신중년의 나는 강의 내용을 열심히 필기하는 학생이었다. 강의 내용은 다시 봐도 처음 보는 내용 같은데 시인이 되어 끄적거린 내용은 당시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데려왔다. 노트 앞머리만 보면 천상 시인 같았는데 몇 장을 넘기니 철학자도 등장했다.
수업을 듣는데 '이상적 자기'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자기는 곧 자기자신.
"자기야"라고 부르는 것은 나와 같은 사람으로 존중하겠다는 의미였나 봐.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거였나 봐. 자기를 잃는다는 것은 곧 나를 잃는다는 거였고, 자기를 잃는다는 것은 곧 내 세상의 반쪽을 도려내는 거였어. 이 통증과 고통과 아픔과 슬픔은 당연한 거였어.
2020년 09월 27일(일)_ 한기대 신중년 교직훈련과정 중
어떠한 존재하고의 헤어짐, 서로 헤어지게 되는 현상, 서로 갈리어 떨어짐. 이별을 정의하는 무수한 용어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별이란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심연에 잠기게 한다. 어둡고 슬프고 아프다. 이별은 자기자신을 잃는 과정이다. 자기자신을 도려내는 과정이다. 자기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자기자신으로 채워지는 과정이다. 아프고 힘들고 버겁다.
수업을 언제 들었는지 노트에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철학자가 되어 끄적거린 노트 안에 '오늘 흥석이 생일이구나! 네 생일에 너에게 가고 싶었어. 다행히 나는 수업이 있고.'라고 적혀있으니 모를 수가 없다. 09월 27일. 오래전 우리 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나의 후배 흥석이의 생일이다.
나는 오래 있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가야 하니까요
지난 연말 꿈으로 찾아와 인사와 안부를 나눴던 나의 후배. 모든 물은 이어져 있지만 조만간 들르기로 했으니 잘 지내다 꽃피는 봄이 오면 살랑거리며 만나러 가야지 싶었다. 이미 인스타에는 매화꽃이 넘실거리고, 벚꽃 명소들로 봄을 알리는 사진들이 넘쳐났지만 나의 봄은 언제나 '목련꽃'으로부터 시작된다. 목련꽃이 피면 나의 봄은 시작되고, 목련꽃이 질 무렵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질 무렵 에버랜드에서는 튤립축제가 열린다. 올해도 목련꽃은 봄이 되어 내게로 찾아올 것이다.
'이상적 자기'로부터 시작된 자기와 자기자신, 이별과 아픔까지. 당시의 고민은 나의 뇌세포에 각인되어 있었겠지만, 생성되는 뇌세포보다 소멸되는 뇌세포가 많은 나는 또 언제나처럼 잊고 있었다. 나의 이별이 언제나 아팠던 이유를 한기대 노트의 끄적거림으로 찾아냈다. 철학적 사유도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나 보다. 그리하여 나는 또 이렇게 앉아 쓰기를 하고 있지만,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망각이라 했는데 자꾸 끄집어내어 휘감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무거운 마음을 접고 꽃피는 봄이 오면 그리운 마음 가득 담아 널 만나러 가야겠다. 목련꽃이 피면 나의 봄이 시작된다. 곧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