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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사 Dec 27. 2023

까만 밤, 아주 까만 밤

:


"오늘은 일찍 왔네?"


"나는 오래 있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가야 하니까요"


"그렇대? 알았어. 좀 있다 봐"


겨울마다 입술 주변이 벌겋게 올라오다 못해, 허옇게 껍질이 벗겨진다. 영기가 지루성피부염이라고 연고를 처방해 줬는데 발라도 그때뿐이고. 못 먹어서 버짐 핀거마냥 추하기 그지없네. 머리 꼬라지 봐라. 뿌리염색해야 하는데 아휴 귀찮아. 오늘따라 꼬질꼬질. 꼬질이가 따로 없고만.


"혹시 얼굴에 바를 거 있니?"


건네받은 스틱오일을 꺼진 볼때기와 허옇게 올라온 입술 주변에 펼쳐 바르다 스틱이 뭉개졌다. 은경이가 비싼 거랬는데 하나 사줘야 하나. 하얀 겉 케이스에 노란 스티커. 기억해 뒀다 하나 사줘야지.


"애기는?"


"오빠가 봐주고 있어요. 이제 곧 가야 해요."


그치. 아이 키우는 엄마가 오래 있기는 불편하지. 그래도 좀 앉았다 가지 왜 자꾸 서성거리고 있을까? 옷은 따듯하게 잘 입었네. 어그부츠에 추리닝. 역시 동네 주민다운 옷차림이야. 잘했어 은정아.


"너는 왜 저 테이블로 안 가?"


"그냥. 달리 할 얘기도 없고. 좀 있다 가야 하기도 하고"


"그래? 그럼 커피나 마시자"


가뭄에 콩 나듯 연락하지만, 연락하는 동기놈이라고는 이 놈 밖에 없는데 오늘따라 축 처져있는 게, 내 꼬라지랑 다를 게 없네. 뭔 일 있나? 역시 커피는 너무 맛나. 맛있다. 근데 뭐 이리 시끄러워? 성현이도 왔네! 쟤는 하나도 안 변했고만! 멀끔 멀끔. 머리 까만 거 봐라. 염색했나? 아씨 염색. 나도 염색해야 하는데. 병욱이도 신났는데? 남자 넷이 모여서 무슨 수다를 떨고 있댜?


+


현실에서는 한 번을 모이지 못했던 우리가 꿈에서 만났다. 나는 이들이 매우 보고 싶은 걸까, 어찌 지내는지 궁금한 걸까, 연락 한번 없음이 그저 야속한 걸까, 25년 전 세상을 떠난 나의 후배 흥석이는 가끔씩 꿈을 통해 나에게 찾아온다.


가지 마라

가야 해요


떠나지 마라

떠나야 해요


2014년 01월 03일. 나직하고 차분했던 우리의 대화를 끝으로 흥석이는 꿈에서조차 만날 수 없었다.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조차 만날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인데, 그저 잘 지내고 있길, 그저 평안하길, 그저 그가 있는 그곳은 날마다 웃을 수 있길 기도할 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만났다. 빨간 후드티를 입고 떠난 흥석이는 검은 모직자켓을 입었고, 스무살 언저리였던 우리들은 현실 속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그곳에서도 세월은 흐르나? 미지의 그곳은 언제나 질문만 남긴다.


가지 말라고 붙들었는데도 그는 가야 한다고 했다.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는데도 그는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랬던 나의 흥석이가 이제는 우리를 배웅한다.


"나는 오래 있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가야 하니까요."


만날 수 없다 하여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난다 하여 매일매일 그립지는 않았다. 흥석이가 떠오를 때면 여전히 아릿하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어쩔 때는 눈물도 나지만, 난 웃기도 하고, 밥도 먹으며 살아 지내고 있다.


미지의 그곳에서도 세월은 흐르지만, 현실의 우리들 시간보다는 더디 흘러 흥석이는 여전히 우리를 그리워하는데, 우리는 너무 빨리 잊고 있는 건가?


'세상에 모든 물은 이어져 있으니, 세상 어느 곳이든 나의 고향이라' 아스달 연대기에 등장한 모모족 대장의 말을 아로새기며, 이번 흥석이 기일에는 그를 보냈던 금강 청벽나루터가 아닌 월악산 근처를 따라 충주호로 이어진 강가에서 술 한잔 나누었다. 아쉬웠던 걸까? 이리 나에게 찾아와 사람들과 술 한잔 나누는 걸 보니.


_



꿈이란,

듣고 싶은 말을 위해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일 수도 있다.

경험한 것이 기억으로 옮겨지는 과정일 수도 있다.

감춰뒀던 마음을 드러내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무의식의 의식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꿈에 대한 어떤 정의든 간에,


흥석이의 배웅은 떠난 자가 남은 자에게 보내는 인사 같았고,

우리의 술 한잔은 남은 자가 떠난 자에게 보내는 안부였다.



_ 2023년 12월 27일 햇살 가득한 수요일_ 새벽녘 꿈에서 깨어난 나는 출근 전 셀프 뿌리염색을 했다. 어제 퇴근 후 하려 했던 뿌리염색을 하지 못해, 평안히 잘 지내고 있는 흥석이까지 소환했나 싶어, 아침부터 수선을 떨었다. 해마다 그의 기일에 우리는 안부를 전하지만, 그는 해마다 찾아오지는 않았다. 꿈에서라도 볼 수 있음이, 떠날 때 모습이 아닌 좀 더 자란 어른으로 나타남이, 흐릿하지 않고 생생한 기억으로 남음이, 아릿하고 쓰린 마음을 보듬어 준다.



모든 물은 이어져 있지만, 그래도 조만간 들를게. 잘 지내다 보자.



_ 2023년 12월 27일 오후 05:47 _ 꿈에 흥석이를 만나고, 꿈속의 그 모습이 잊힐세라 일하는 틈틈이 글을 쓰다, 배우 이선균 씨의 사망 기사를 보게 됐다. 떠난 자의 수만 가지 이유는 뒤로하고, 까만 밤을 지옥보다 더한 고통으로 지샐 남겨진 자의 통한이 가슴을 저민다.



마음을 담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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